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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Jun 25. 2018

그래도 설거지는 해야 하니까

30대 1인 가구, 행복한 혼자를 위한 습관을 말하다

설거지가 싫다. 어느 정도로 싫은가 하면 화장실 청소보다 싫다. 화장실 청소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둘 중 평생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화장실 청소를 선택할 것이다. 아, 물론 화장실 청소를 선택하는 건 ‘우리 집’ 화장실일 경우에만 한정된다(<파우스트> 같은 걸 보면 악마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척하지만 ‘이제부터 너는 전국의 공공화장실 청소를 해라’ 등등의 상황이 만들어지곤 하므로. 계약 전에는 상세 조항 확인이 필수다!).



설거지가 싫은 이유는 많다. 간단히 한 끼만 먹었다고 치더라도 젓가락, 컵, 그릇 두 개는 기본, 개수부터 많다. 게다가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빨간 기름, 하얀 기름이 둥둥 뜨는데 비주얼부터가 굉장해서 보는 것부터 괴롭고, 그 기름 양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세제 양을 가늠하는 게 1단계다. 세제 양이 부족한 경우에는(보통 수세미질을 끝내고 헹구다가 발견한다) 아까 했던 단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럴 때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고, 환경보호고 뭐고 세제를 콸콸 들이붓고 싶어진다. 게다가 무언가가 그릇에 늘어붙었을 때…… 아아, 분명히 아까부터 불려뒀는데 아직도 딱딱하면 나중에 설거지를 또 해야 한다는 생각에 차라리 그릇을 버리고 싶어진다.




싱크대 수챗구멍은 어쩔 것인가. 수많은 음식물 찌꺼기가 투과되다 만 그곳(분명 내 입에 들어간 것들의 잔여물인데 내 입에 들어갈 때는 세상 깨끗한 것이 싱크대만 거치면 세상 더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신경 써서 닦아도 며칠 뒤에는 다시 미끌미끌한 때가 끼어 있는 그곳.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이해하리라 믿는다. 식기 건조대도 마찬가지다. 보통 창살처럼 스텐레스로 된 것이 많은데 이것도 오래 쓰다 보면 물때가 낀다. 그럼 살 하나하나를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살살 닦아주어야 하는데 크기는 좀 큰가. 싱크대를 꽉 채운 그것을 거품이 튀지 않게 요리조리 돌려 닦다 보면 설거지 거리 안 생기게 웬만하면 밖에서 사 먹어야겠다는 결심만 확고해진다. 그 외 가스렌지 환기구도 있는데 말 꺼내기도 싫다. 그 수많은 90도들 사이에 요리조리 찐득하게 낀 기름때라니. 



하지만 매일 컵라면과 배달 음식만으로 살 수는 없는 터. 그리고 나는 컵 없이 맥주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컵 없이 맥주를 마시면 트림이 많이 나온다. 캔 안에서 탄산이 잘 안 빠지는 게 원인이라고)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설거지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아아, 정말 화장실 청소보다 싫은데. 하지만 1인 가구이다 보니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 양자택일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래, 이제 슬 설거지와의 권력 다툼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그래서 최근 고안한 방법이 있다.



싫은 일을 할 때는 좋은 일과 함께할 것.



식당에서 샐러드를 시키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지만 샌드위치에는 반드시 풀이 많아야 맛있지 않나. 풀에 햄과 빵을 껴주면 맛있게 먹는 것처럼 싫어하는 일에 좋아하는 일을 껴주면 그 일은 100퍼센트 싫어하는 일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두는(이 부분이 중요하다. 음악에 푹 안겨 있는 느낌) 것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보사노바를 좋아해서 주앙 지우베르투나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의 음악을 듣는데 최근에는 시티팝에 꽂혀서 오하시 준코의 <Telephone Number>와 아마시타 다쓰로의 <Magic Ways>를 듣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철퍽철퍽 설거지를 끝낸 뒤에는 작은 유리컵에 아바나 클룹과 콜라를 섞어 소파에 앉는다. 플레이리스트에 남은 음악을 들으며 홀짝홀짝 마신다(겨울에는 우유를 넣은 따끈한 믹스커피도 좋다). 그렇게 몇 분간 싫어하는 일을 잘 마친 나에게 상을 준다. 그리고 이걸 다 마신 뒤에는 뭘 하고 놀지를 잠시 고민한다. 이렇게 나는 혼자 산 지 1n년 만에 설거지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아, 하지만 식기 건조대 씻기와 가스렌지 청소는 여전히 하기 싫은 일이다. 이것들은 아무리 좋은 음악과 술을 보상해준다고 해도 좀처럼 마음먹기 어려운 레벨이다. 자, 설거지에 대한 거부감이 좀 사라졌으니 이제 이것들과 화장실 청소를 누가 좀 대신 해줬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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