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로운 경험들
3. 새로운 경험들 (1)
우리는 봄이 오기 전 1월에 일본을 다녀왔다. 작년 말 부터 피터의 사무실이 별로 좋지 못했음에도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상식이 풍부한 피터가 재미삼아 전화로 참가한 라디오 퀴즈프로그램에서 1등을 했고 부상으로 받은 4인 가족 일본 3박4일 여행권 덕분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5인이었으므로 피터는 어린이 항공권을 하나 더 구입했다.
결승을 가른 문제의 정답은 ‘엔테베 작전’이었다.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이 에어프랑스를 납치하자 이스라엘특공대가 엔테베 공항에서 구출에 성공했던 작전의 이름을 맞추는 것으로 평소 첩보, 전쟁 같은 것에 관심이 많던 피터에게는 그야말로 행운의 문제였다. 피터는 주방 벽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에 엔테베 작전이라고 크게 써놓고 볼 때마다 보드를 툭툭 치면서 으스댔다.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에 심취해 일본을 동경하던 요섭은 말도 못하게 흥분했지만 우리가 획득한 여행권은 오사카부근의 온천 입장료와 호텔료만 지불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만 4일을 머물다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일본에만 가면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에 관한 무슨 큰 볼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요섭이 실망할까봐 우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얼마 전의 내 경험으로 볼 때 그건 가능한 환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첫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오드리헵번이 커피와 도넛을 들고 티파니 상점 앞에서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도시의 조용함이 좋았다. 나는 미국에만 가면 티파니 상점이 있고 조용한 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이모에게 이야기 했더니 이모도 예전에 미국에만 가면 로버트 레드포드를 만난줄 알았던 적이 있었노라고 했다. 나는 이런 환상에 대해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모는 나의 이해에 대해 현명한거라고 칭찬했지만 나는 내가 너무 현실적인 애라고 생각되었다.
요섭의 흥분과 기대에 관한 현실적 환상을 설명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저 본인이 몸소 체험하는게 최선이다. 실망을 하든 좌절을 하든 말이다. 허지만 혹 내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요섭의 눈에 보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나는 약간은 믿는다. 그건 관심의 차이와 만족의 차이 그리고 우리의 나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게다가 나와 요섭은 같은 나이긴 해도 좀 다르니까.
3박4일 동안 살갗이 쪼글쪼글 해지도록 온천을 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먹었다. 음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지만 그렇다고 입에 딱 맞지는 않았다. 토종취향인 피터는 가장 적응을 못해서 수시로 가게에 들어가 콜라를 사서 마셨다. 피터는 가장 글로벌한 음식은 콜라라고 단정 지었다.
셋째 날에 오사카 시내구경을 나갔다가 서점에 들러 드래곤볼에 관한 커다랗고 두툼한 칼라판 책을 하나 샀다. 만화일 뿐인데 이런 책을 내다니 드레곤볼의 명성이나 위력이 짐작되었다. 요섭은 책을 보면서 쉴 새 없이 탄성을 질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일상적 삶이 소개되면 신기하고 재미있듯이 요섭도 그런 기쁨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