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연재
때는 이천십구 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시은과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는데, 2019년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그날따라 버스에 사람이 유난히 더 많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이 오가는 버스였기 때문인지, 그날따라 신경이 더 곤두서곤 했다. 종점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버스를 타게 되어 다행히 시은과 함께 앉을 수 있었다. 목적지까지 향하기 위해선 총 10 정거장 정도를 가야 했는데, 간신히 자리를 잡은 우리를 제외하곤 버스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불만을 표시한다거나, 짜증을 내진 않았던 것 같다.
요즘 들어 생성되고 있는 버스들을 보면 좌석을 더 채우기보다, 빈 공간을 두는 경우가 더 많아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서 있는 사람들은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자주 흔들리고, 서로 부딪히는 일이 잦지 않나... 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꼈을 때 버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버스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쪽으로 몸이 쏠렸다. 그 순간, 곧 내릴 준비를 하던 40대 중반처럼 보이는 아주머니가 젊은 여성분에게 큰소리를 치신다.
“그렇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해. 그쪽 때문에 내 손이 눌리잖아.” 그 말을 들은 젊은 여성이 아주머니를 보며 고개를 몇 번 까딱하자 말을 잇는다.
“요즘 아가씨들은 사과를 쳐할 줄 몰라.” 순간 흠칫했다. ‘요즘 아가씨들?’ 모든 젊은 여성들이 그렇다는 듯이 합리화시키는 아주머니의 발언을 곱씹으면서. 무엇보다, 그 버스 안에 있는 모두가 불편한 상황이 아니었나? 교통수단인 버스 안에서, 사람이 많은 공간 안에서 부딪히는 상황이 불편한 것 아니었나? 그러한 상황을 모두가 고려하고 수긍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젊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반말을 받는 것이 당연한 대상이 되었나. 무척 궁금하고 이해할 수 없다가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만 하는 현실에 신세한탄만 잔뜩 털어놓을 뿐이다. 아주머니는 이해할 수 없단 듯이 혐오의 눈빛을 유지하다 버스에서 하차를 했다.
정거장에서 하차하는 사람들이 많듯이, 버스에 승차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까보단 비교적 사람이 줄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답답하고 꽉 채워진 공간인 건 여전했다. 또다른 정거장에 도착해 버스에 탑승하시는 할머니께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좌석을 쓱 돌려보시곤 말한다.
“요즘 애들은 양보를 할 줄 모르고 다 앉아있네.”
그때부터 ‘애들’인 우리는 좌석에 앉아 침묵의 눈치싸움을 시작한다. 합리화시켜버리는 그의 말에 기분이 나쁘지만, 어쩔 수없이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하면서. 우리는 언제부터 ‘애들’,’젊은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양보 대상이 되었나. 우린 언제부터 먼저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배려와 양보에 무지한 사람이 되었나.
물론 이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한 개인 견해일 뿐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이러한 모욕감이 한 두 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자신보다 젊다는 이유로 핀잔을 주고, 자신을 향해 양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세상은 아직 바뀌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노약자와 임산부를 위한 좌석은 많이 존재하지만, 젊은 세대들을 위한 전용 좌석은 따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좌석 창가에 붙어있는 스티커마저 어떤 상황이든 배제하지 않고 양보하는 행동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피곤할 때나, 다리가 아픈 날 만큼은 양보를 하지 않아도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사회가 온다면 좋겠다. 쉬지 않고 목소리를 누누이 내는 것은 하기 싫어서 양보를 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노약자들을 위한 복지가 제공되고 양보가 우선시 되는 것처럼, 젊은 세대들 또한 무시당하지 않고 때로는 양보를 받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화했다면 앞으로도 그에 따라 변화해야 할 이유가 충분할 거라고 생각한다. 먼 훗날에는 우리가 먼저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 존재의 가치를 알아주는 시대가 올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