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피사
피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에 조금 못 미쳐 있었다. 하루 중 가장 부산한 때가 지나고 지평선 가까이 내려앉은 해를 따라 공기도 차분히 가라앉는 시간이다. 차에서 내리니 굳건한 성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벽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얼핏 나는 것 같다. 이런 늦가을 늦은 오후의 하늘 아래서라면 얼마든지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성벽 안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렸을 적 먼 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교과서를 통해, 그 외 수많은 출처의 사진과 그림을 통해 머릿속에서 재생산되는 동안 피사의 사탑은 마법의 효력을 조금 잃어있었다. 즉, 세계 몇 대 불가사의니 뭐니 하는 수식어로 형용되어도 나에게는 남태평양 심해 어디쯤에서 포착되었다는 30미터 길이의 고래처럼 '진짜로 가능한 거야?’와 '그럴 수도 있나 보네' 사이의 어디쯤으로 인식되고 있던 것이다. 그런 피사의 사탑이, 성벽의 끝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피사의 사탑을 바라보고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당연히 기울어져 있어야 할 탑이 기울어져서 놀랐다니. 이곳을 찾은 이유가 다 이 비스듬히 서있는 탑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러나 모든 건물이 땅에서 수직으로 솟아있는 세계에서 온 나의 눈에 4도만큼의 기울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피사의 사탑이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것이었다. 피사마을의 기울어진 탑. 자명한 설명을 그대로 옮긴 고유명사로 부르고 듣는 동안 나의 관심의 대상은 기울기였을 뿐, 한 번도 그 심미성이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피사의 사탑은 상아빛 대리석으로 켜켜이 쌓아 올려진 아치가 매우 우아한 건축물이었다.
감탄은 옆에 나란히 놓인 피사대성당과 세례당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장식은 은은한 대리석과 만나 절제된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었다. 하늘을 분홍색 주황색으로 물들인 석양은 대리석에 반사되어 다시 한번 황홀한 빛을 공기에 더하고 있었다.
이 찬란한 풍경을 채우는 것은 사람들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난간 위에 올라가 아슬아슬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다가도 열과 성을 다해 처음 본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모습을 배경으로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도 사진 찍기 열기에 동참했다. 원하는 각도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아 마음에 드는 사진은 수십 장에 한 두장이 있을까 말까였지만 그 자체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스크림 콘으로 피사의 사탑을 받친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고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도 바닥에 콘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런 사진도 남겼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차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오래 보고 있다 보면 수평감각에 혼란을 주는 피사의 사탑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남겨봤다. 피사의 사탑은 수많은 보수를 거쳐 무너질 가능성이 아주 적어졌다고 한다. 다만 보수공사가 너무 잘 되어 바로 서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피사의 사탑이 온 세상의 다른 건물들을 따라 수직으로 서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피사의 사탑이 아직 당연하게 기울어져 있을 때 보러 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