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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나 Oct 09. 2023

중세시대로의 여행

10. 브롤리오 성, 시에나

피렌체에서 머문 5일 가운데 이틀은 근교의 소도시 여행을 위해 쓰기로 했다. 하루 동안 친퀘테레와 피사를 둘러보기로 결정하고 나니 남은 하루의 일정을 정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토스카나까지 왔으니 키안티 지방의 와이너리도 한 군데 쯤 가보고 싶었고, 옛 이태리의 모습이 남아있는 마을도 구경하고 싶었다. 그렇게해서 이 날의 목적지는 리카솔리 와이너리가 있는 브롤리오 성(Castello di Brolio)과 시에나로 정해졌다. 이동을 위해 기사님이 하루동안 함께해주기로 했다.


아직 어스름이 깔린 아침 숙소 근처에서 기사님을 만났다. 백발의 수염과 머리칼을 기른 멋쟁이 이태리 할아버지였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응시하고 있던 창 밖으로 새로운 풍경이 천천히 펼쳐졌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꼬모호수, 친퀘테레에 이어 벌써 3번째였다. 이른 아침의 피곤함,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 차 안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에서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함이 느껴지는 만큼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실감이 났다.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1시간 반 가량을 달려 브롤리오 성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한 와이너리 투어가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커피를 한 잔 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커피를 못마시는 남자친구도 보리로 만든 커피 도르조(d’orzo)를 주문했다. 수확이 끝나 황량한 포도밭을 배경으로 코 끝에는 알싸한 공기가 느껴져 도저히 커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초겨울의 아침이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에 폭 반해가고 있을 때 가이드 안나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투어는 브롤리오 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10세기 경 시에나와 피렌체의 중간 지대에 지어진 브롤리오 성은 두 나라 간 수 많은 분쟁이 일어났던 중세시대를 거치는 동안 훼손과 재건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리카솔리 가문은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12세기 이후로 쭉 성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게 안나의 설명이었다.

방문객에게는 아직까지 리카솔리 가문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을 제외한 영역이 공개되고 있었다. 우리는 안나를 따라 성 안의 예배당을 거쳐 별관에 도착했다. 각종 무기며 수집품이 전시된 곳이다. 꼬모호수에서 방문했던 빌라에 살았다는 귀족이 생각났다. 전세계를 다니며 귀중품을 수집하는게 취미였다는 사람이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미지의 세계를 다니며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고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럭셔리였을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성 내부 구경을 마친 뒤 안나는 브롤리오 성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성곽으로 안내했다. 성곽 너머로는 잘 가꿔진 정원과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내려다보였다. 누렇게 물든 포도밭과 그를 둘러싼 빛바랜 초록이 만연한 가을 느낌을 더했다. 매일같이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 싱가폴에서 멀리 떠나온 것이 오감을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시원하게 트인 풍경을 마주보고 서 있는건 언제 지어졌는지도 모르는 성이었다. 토스카나에 있는 이 작은 마을까지 오는 길에서 시간여행을 함께 해버린 것 같았다.

브롤리오 성에서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리카솔리 가문이 이주한 12세기의 일이다. 성 주변의 비옥한 땅에서 차츰 늘려간 포도밭은 현재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리카솔리 와이너리는 또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블렌딩을 정립한 곳으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전까지 와이너리마다 다르게 채택된 중구난방의 비율을 대체하기 위해 토스카나 지방의 기후와 토양에 가장 적합한 블렌딩 비율을 고안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현재는 산지오베제 품종을 80% 이상 사용한 것만이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이제 그 와인을 맛보러 갈 시간이었다.


안나는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을 구경시켜준 뒤 시음하는 장소로 안내했다. 우리는 근래 최고 빈티지 중 하나였다는 2016년산을 3종류 마셨다. 와인 맛을 잘 모르는 내 입에는 전부 다 맛있었던 기억이다. 가을의 흙 냄새, 나뭇잎 냄새가 섞인 찬 바깥 공기를 잔뜩 맞고 와서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기념으로 간직하기 위해 특히 맛이 좋았던 가운데 것을 한 병 샀다.

다시 차를 타고 이번에는 시에나로 향할 차례였다. 중세시대에는 번성한 나라였던 시에나는 인접한 피렌체와 계속해서 다툼을 벌이다 16세기 말 토스카나 대공국에 흡수되며 공화국 역사의 막을 내렸다. 이후에는 오히려 분쟁을 비껴나게 되며 중세시대의 유산을 잘 보전하게 된 한편, 역사의 중심에서도 한발짝 물러서며 현대의 도시로 발전하는 대신 예전 모습을 그대로 이어오게 된 곳이기도 하다. 그 옛날의 모습이 피렌체와는 또 어떻게 다르게 간직되어 있을지 기대되었다.


시에나 대성당 근처에 우리를 내려준 기사님은 캄포 광장에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셨다. 어느 길로 가든 결국에는 광장에 닿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얼마쯤 걸으니 대성당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뾰족한 첨탑은 밀라노 대성당을, 색색깔의 대리석 장식은 피렌체 대성당을 연상시켰다. 차를 타고 오는 길 기사님은 대성당의 건축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시에나와 피렌체 사이에 성당을 더 크고 멋있게 지으려는 경쟁이 붙었는데, 시에나는 원래의 성당을 확장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다가 흑사병이 도는 바람에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라도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을텐데, 그 사이 힘이 더 세져버린 피렌체가 시에나를 견제하는 바람에 그것도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과연 대성당 옆쪽의 벽면은 어색하게 마감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대성당을 뒤로하고 발길이 닿는대로 걸었다. 듣던대로 시에나는 오래되고 아기자기했지만, 예스러운 건물에는 또 그마다 상점이 들어서있기도 하여 피렌체 골목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어렸을때 그렸던 성들이 으레 그렇듯 꼭대기가 삐죽삐죽한 건물을 지났고 주택가가 들어선 경사길을 걸었다. 계속해서 걷다가 양 옆으로 상점이 늘어선 골목에 들어섰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는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정면에 보이는 것은 푸블리코 궁전과 만자의 탑이다. 궁전치고는 소박해보이는 모습이지만 한때는 위세를 떨쳤던 시에나의 역사가 쓰여지던 곳이라 생각하니 점잖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비치는 광장에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캄포 광장은 사실 매년 여름 ‘팔리오’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경마 대회가 유명하다고 한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광장에 앉아 팔리오 대회가 열리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만자의 탑에서 종이 울리며 기수들의 행진이 시작된다. 한여름의 더위와 빼곡히 모여든 관객들의 함성으로 열기가 고조되었을 때 말들이 힘차게 달려 나간다. 상상만으로도 멋있다.

시에나에서의 짧았던 산책을 마치고 다시 피렌체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드론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기사님은 황금빛 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을 찾아주셨다. 남자친구가 드론을 날리는 동안 나는 젊은 농부가 트랙터로 밭을 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토스카나에서 하루동안 훌쩍 중세시대로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은 하루의 마무리로 더할나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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