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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나 Oct 09. 2023

아쉬움을 남긴 친퀘테레

8. 리오마조레, 마나롤라, 베르나짜

친퀘테레. 여행지로 끼워 넣을지 고민을 시작했을 때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던 곳이다. '친 뭐시기'로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그 뜻을 찾아보았다. Cinque Terre, 숫자 5를 가리키는 Cinque, 땅을 가리키는 Terre라는 단어를 붙인 말로 서부 해안가의 5개 마을을 통칭한다고 한다. 그제야 의미가 명확해지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해안가 절벽이 주황, 하양, 노랑빛 주택으로 층층이 채워져 있는 곳. 그 절벽 밑 어디쯤인가에 파라솔이 펼쳐져 있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배들 중 몇몇은 쉬고 몇몇은 유유히 물살을 일으키며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을 것 같다. 내 상상 속의 이태리에서 존재할 법한 모습이었다. 마침 피사의 사탑과 묶어서 가기에 좋다고 하니 하루 시간을 내어 다녀올만하다. 그렇게 해서 피렌체에서 보내는 두 번째 날의 계획이 정해졌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안드레아의 차가 숙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I just drive라는 여행사를 통해 찾은 안드레아는 여행사 이름대로 가이드 없이 운전만 해주기로 되어있는 기사님이었다. 결국에는 기사 이상의 역할을 하며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해주셨지만. 우리를 태운 안드레아는 한 군데 더 픽업을 들렀고, 차는 이내 오늘 하루를 함께 보낼 8명으로 채워졌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아직 고요한 도로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잠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환해진 지 오래인 창밖으로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서든 잠에 쉽게 드는 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다. 산자락에 붙어 아슬아슬하게 나있는 굽이진 도로의 옆으로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눈이 시원해지는 광경에 정신이 드는 것 같으면서도 공기 중에 맴도는 햇빛에 반쯤은 몽롱한 상태로 얼마쯤 있으니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리오마조레(Riomaggiore)는 우리가 들르기로 한 3개 마을 가운데 첫 번째였다. 이른 아침부터 2시간 반 동안 졸다 깬 뒤 차에서 내렸을 때 들었던 솔직한 감상은 실망에 가까웠다. 사진에서 보던 것과 달리 건물은 빛이 바래고 칠이 벗겨져 있었고,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그물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야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뜨내기 관광객들이 코앞까지 몰려들어와 이곳저곳 사진을 찍어대는 형세가 그들에게는 유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오마조레에서 주어진 1시간 동안 우리는 우선 아침을 해결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이른 시간부터 손님이 넘쳐나는 가게들 사이에서 마침 노천 테이블 한 곳이 비어있는 카페를 발견하고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누텔라가 발라진 머핀과 카푸치노. 이태리와 어울리는 아침이다. 당과 카페인을 섭취하니 몸에 에너지가 조금 도는 듯했다. 이 기운을 모아 우리는 전망대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마을 꼭대기에 전망대로 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었다. 깎아지른 비탈을 따라 나있는 계단을 다 오르고 골목을 돌면 그만큼의 계단이 또 나타나는 식이었다. 중간중간 예고편 같은 풍경이 보일 때마다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평지가 나왔다. 짠 하고 나타난 전망대는 근사하기보다는 어딘가 휑한 느낌이다. 무언가 공사하던 흔적이 남아있고, 시선이 바다에 닿기 전에 간이 난간이 눈에 걸렸다. 바로 뒤쪽에 위치한 성당과 관련 있어 보이는 십자가가 색다른 느낌을 더한다고 위안을 삼아보았다. 멀리 트레일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뻥 뚫린 바다를 옆에 두고 걷는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특히 이렇게나 맑은 날씨라면. 투어 그룹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고 할 수 있는 구경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텅 비어있는 전망대를 한번 더 쓱 둘러보고 내려갈 준비를 시작했다.

투어 그룹을 다시 만난 건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한 배를 타는 선착장이었다. 이 날은 비수기에 접어들기 전 배가 운행하는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배에 올랐다. 다들 올해 배를 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싫었던 것인지 배 안은 앉을자리 하나 없이 붐볐다. 다행히 배는 출발한 지 10여분 만에 두 번째 마을 마나롤라(Manarola)에 도착했다.


해안가 마을이라는 점에서 구조는 비슷했지만 마나롤라는 첫 번째 마을보다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군데군데 야자수가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전망대에 올라가면서 힘을 뺀 터라 이곳에서는 한 박자 쉬어가며 남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다녀보기로 했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걷다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같은 투어 그룹에 있던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왔다는 인도인 커플과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가던 길을 마저 가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중년 부부가 또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말을 걸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가고 서기를 반복하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회색 돌길을 걸었다. 청량한 공기 사이로 내리쬐는 늦가을 지중해의 햇살 속에서 시간은 이곳만의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마지막 마을에 갈 시간이 되었고 약속한 장소에서 투어 그룹을 만나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약 12시쯤 된 시점이었다.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피로가 몰려왔던 기억이 난다. 베르나짜(Vernazza)에 도착해 함께 점심을 먹는 게 어떻겠냐는 안드레아의 제안에 투어 멤버 모두가 동의했다. 기차에서 내려 향한 식당은 우리는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백반집의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대로 화이트 와인 맛이 진하게 나는 봉골레 파스타가 아주 맛있었다.

베르나짜를 둘러볼 때쯤에는 반복되는 해안가 마을의 모습에 감흥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다 같이 식사를 마친 우리는 안드레아의 추천에 따라 또다시 전망대로 향했는데, 이곳에 오르는 여정은 첫 번째 마을에서보다는 수월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 역시 익숙해져 있었다. 감상은 그만두고 남자친구와 서로의 수고를 도닥이며 돌로 만든 담벼락에 나란히 앉았다. 그때 이곳에 다시는 올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스치며 발 밑으로 펼쳐진 바다가 눈에 새로이 들어왔다. 마지막일 친퀘테레의 바다였다. 저 멀리 바다에 면한 암벽에 나있는 둘렛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번은 저들에게 몇 번째 친퀘테레일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남은 시간을 모두 담벼락에서 보낸 뒤 전망대를 내려갈 때에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되어있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아쉬운 법이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안드레아의 차로 돌아가는 길, 한 손에 젤라토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기념품 가게 앞에 전시되어 있던 엽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친퀘테레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아쉬움, 그리고 이만큼 멋진 풍경은 직접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투어 멤버들이 모두 모였고 안드레아는 피사를 향해 운전을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바닷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길에 접어들자 시종일관 조용하던 안드레아는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모두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영문을 모른 채 차에서 내린 우리에게 안드레아는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를 가리켰다.


“저 멀리 산 위에 하얀 부분 보여? 저기가 미켈란젤로가 가장 좋아했던 대리석 산지래. 직접 가서 조각에 쓸 대리석을 골라오기도 했대.“


이어서 안드레아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프로세코 한 병을 꺼내더니 모두에게 한잔씩을 따라주며 말했다.


“짧았던 하루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 즐거웠어. 우리 피사에 가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보자. Cheers!”


미켈란젤로의 흔적과 함께하는 늦은 오후의 프로세코 한잔. 지극히 이태리스러우면서도 예상치 못했던 이벤트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이 술 한잔에 곯아떨어져 단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에는 한 군데 관광지를 더 돌아볼 만큼의 에너지가 채워진 채로 피사에 도착해있었다. 안드레아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가 적중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개운한 기분으로 차에서 내렸을 때는 황홀한 풍경의 피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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