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 레푸블리카 광장, 피렌체 대성당
피렌체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도시였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해가 저무는 모습을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고 레푸블리카 광장에 있는 회전목마도 보고 싶었다. 한밤중에 달을 끼고 걷듯 대낮에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속 주인공처럼 붉은 지붕의 두오모 성당과 함께 걷다가 미술관에 들어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도상 장화의 목 부분에 위치한 피렌체까지 내려오고 나니 피사, 키안티, 시에나 등 주변에 갈 곳이 많아졌다. 예술에 자연, 미식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풍요의 땅 토스카나를 만끽할 시간이 온 것이다.
피렌체에 도착한 건 해가 진 뒤였다. 어둠이 내린 대도시가 초행자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은 밀라노에서 삭막했던 첫날밤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기차역 밖에서 처음 만난 피렌체 역시 상상했던 낭만의 도시가 아니었다. 버스며 자동차로 번잡한 도로 옆으로 행인과 노점상이 왁자지껄하게 뒤섞여있는 모습에서는 두오모가 그 자태를 도도하게 드러내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에어비앤비로 가는 길에서도 난관은 이어졌다. 거리 상으로 가까워 보여도 막상 택시로 가려니 일방통행 길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걸어가는 것을 택한 것은 실수였을까. 하필 주변에서는 행사가 끝난 것인지 인파가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고, 우리는 그 무리를 거슬러 올라갔다. 끝도 없이 이어진 돌길 위로 캐리어가 내는 요란한 소리는 덤이었다. 말없이 걷는데만 한참을 집중했다. 거리에서 자동차가 사라지고 인적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남자친구가 마침내 멈춰 섰다. 짙은색 나무로 된 커다란 대문이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건물 앞이었다. 해냈다. 속으로 쾌재를 외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외관과 달리 현대식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리니 어두운 복도 한쪽 끝 문이 반쯤 열린 집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Welcome home!” 기척이 들리자 호스트가 반갑게 인사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기차역에 내린 뒤로 잔뜩 긴장해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게 느껴졌다. 중국계 이태리인인 호스트는 특유의 경쾌한 말투로 집 안 구석구석을 설명하고 나서는 수탉 로고가 붙은 키안티 와인을 선물로 주고 떠났다.
밝고 따듯한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자 녹초가 되어있던 몸에 기운이 조금 도는 듯했다. 허기짐도 느껴지기 시작하여 우리는 밤마실을 다녀오기로 했다. 목적지는 구글 리뷰 3만 5천 개, 평점 4.6에 빛나는 샌드위치 가게였다. 숙소 밖으로는 한적한 도로를 가운데 두고 불 꺼진 카페, 마감 준비 중인 옷가게 같은 상점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구경하며 얼마쯤 걸었을까, 상점의 행렬이 예고 없이 끝나더니 레푸블리카 광장이 나타났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회전목마였다. 사진을 통해 익숙해진 모습 그대로 광장 한켠을 밝히고 있는 회전목마의 느닷없는 등장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후 피렌체에서 시간을 보내며 현대와 중세, 현실과 동화 속을 넘나드는 것 같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는데, 가장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꼭 어울리는 회전목마는 이 도시에 너무도 잘 맞는 상징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레푸블리카 광장을 뒤로하고 몇 걸음을 채 옮기지 않아 거대한 건물의 한 귀퉁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게 피렌체 대성당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새하얀 벽이 눈에 들어온 뒤였다.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벽면을 장식한 굵은 초록색 선은 마치 종이에 그려져 세워진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오묘한 광경이었다. 깜깜한 밤에 처음으로 마주한 피렌체 대성당의 존재는 그렇게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계획에 없던 관광으로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샌드위치 가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게 주변은 줄 세우는 직원까지 동원될 정도로 북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은 다행히도 빨리 줄어들었다. 우리는 가게에서 추천받은 샌드위치 2개를 주문해서 근처의 베키오 다리로 갔다.
1300년대에 지어졌다는 다리의 이름 Ponte Vecchio를 직역하면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그래왔듯 사람들은 다리 근처로 모여들어 난간에 걸터앉거나 그 주위를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도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 주변으로는 별다를 게 없는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하지만 왜였을까 그날 저녁에는 싱가폴에서 함께 온 우리가 함께 이 공간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계획을 짜던 일부터 지금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지나온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여정이 남아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샌드위치는 하나는 맛있었고 하나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그때의 분위기는 그 모든 걸 상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대로 숙소에 돌아가기에 아쉬워 배를 두드리며 좀 더 걸었다. 막 11월에 접어든 무렵이었고,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