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나 Oct 09. 2023

로마, 로마, 로마

12. 트레비 분수, 스패니쉬 계단,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이 도시와 사랑에 빠져버리라곤 나 조차도 알지 못했다. 도시의 거리를 두 발로 걸으며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목격하기 전 까지는. 피렌체를 떠난 기차가 로마로 진입할 무렵 창밖으로 그래피티에 뒤덮인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에 방문한 도시들에서는 볼 수 없던 낯선 모습이었다. 호기심과 경계심. 피로가 누적된 채로 마주한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 로마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테르미니 역은 예상대로 혼잡했고 휩쓸리듯 택시를 잡아탔다. 역을 빠져나오는 택시 안에서 짐을 모두 챙긴 것을 확인한 뒤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방통행로가 문화유산을 뺑 둘러 감질나게 나있던 피렌체나 자동차가 아예 다니지 못하던 베니스와 달리 널찍하게 뚫린 도로 위로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도시의 모습도 피로에 절어 몽롱한 머리를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행 기간 중 잊고 있던 달콤한 낮잠 생각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하지만 낮잠의 유혹이 가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친 다음 요기를 위해 루프탑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선 순간 우리의 눈앞에는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할 만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임페리얼 포럼의 잔해와 그 옆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원주 위에서 로마를 굽어보는 성 베드로 상이었다. 멀리 보이는 베네치아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시린 공기와 잘 어울리는 순백의 조국의 제국이 쨍한 태양 아래 빛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낮잠은 잠시 미뤄두고 도시 이곳저곳을 가볍게 둘러볼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호텔의 바로 맞은편에 있어 로마에 머무는 동안 수없이 지나쳤던 조국의 제단을 가까이서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차선 구분도 없는 돌길 위로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기념관은 실로 웅장했다. 그 자리에 세워지고 스러졌던 수많은 나라들의 유산에 둘러싸인 이태리 반도 통일의 상징물은 로마 여행의 시작점으로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콜로세움이었다. 도보로 15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지만 걷는 것에 이골이 나있던 터라 주변에 공유 자전거들과 함께 무더기로 주차되어 있던 전기 킥보드 가운데 하나를 빌려 탔다.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을 잇는 돌길은 킥보드를 타기에 더없이 불편했지만, 그런 돌길이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은 약간의 불편함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옆으로는 말을 탄 경찰이 지나가고 있었다.


돌길이 끝을 보일 때쯤 콜로세움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 꼭 어울리는 모습으로 서있는 콜로세움은 한편으로는 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에 닳고 닳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아주 이질적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고대 로마로부터 보존되어 온 랜드마크가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이 도시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은 다음날 신청해 놓은 투어에서 더 구경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목적지 없이 걷는 길에서는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를 지나쳤고 이름 모르는 개선문을 두어 개쯤 봤다. 구멍가게가 뜬금없는 곳에서 나타났다가 백화점과 온갖 명품 매장이 들어선 거리에 들어서기도 했다.


트레비 분수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구경했다. 비취색 물과 어울리는 폴리 궁전의 상아색 조각이 참 예뻤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물을 등지고 서서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졌다. 2번 만에 성공했으니 로마가 나를 다시 불러준다면 좋겠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스패니쉬 계단이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은 바로 그 장소였다. 해질 무렵 가장 아름답다는 호텔의 말을 듣고 시간을 맞춰 왔더니 계단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도 난간 한 구석을 차지했다. 붉게 물드는 하늘과 대비되어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이 밝게 빛났고, 사람들은 그 주변을 서성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태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선뜻 내려갈 마음이 들지 않아 한참을 머물며 도시와 사람을 구경했다.

호텔에 돌아갈 때쯤 하늘은 시퍼런 색이 되어있었다. 길거리에는 진한 인상의 백인 청년이 군밤을 팔고 있었다. 내 기억 속 한국의 군밤 장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코가 시리기 시작하는 초겨울 공기 사이로 풍기는 군밤 냄새는 익숙했다. 이태리의 거리에서 한국의 겨울을 생각하며 호텔로 향했다.


이튿날이 밝았다. 콜로세움 투어가 예정되어 있는 날이다. 전날 밤 부쩍 차가워지기 시작한 공기에 더해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바깥에서 많이 걸어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투어 그룹을 만나기로 한 콜로세오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인파 속을 헤맨 끝에 만날 수 있었던 가이드 까밀라는 어깨 길이의 머리를 질끈 묶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방수 자켓과 등산화로 무장한 까밀라는 투어 그룹을 이끌고 거침없이 빗속을 뚫어 콜로세움 내부로 향했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으로만 알고 있던 콜로세움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도로 발달한 곳이었다. 지하는 수많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지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에 있는 동물을 경기장 위로 순식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장치까지 있었다고 하니, 영화 <글레이에이터>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오는 장면은 현실 고증이었던 것이다. 구석구석을 가리키며 열성적으로 설명해 주는 까밀라 덕에 궂은 날씨는 잊고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되었다.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설명은 이어졌다. 글레디에이터와의 싸움에 동원된 것에는 코끼리나 기린 같은 이국적인 동물까지 있었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거대한 경기장에 물을 채워 수중전을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고 하니, 당시 로마 제국의 기술은 어느 수준이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사람과 동물의 목숨을 건 결투는 잔인하기 그지없지만 로마 제국 시민에게는 최고의 오락거리였다는 말에 수긍이 되었다. 현대의 잣대로 2천 년 전의 일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니. 까밀라는 콜로세움에서 아직도 종종 콘서트가 열린다고 덧붙였다. 로마 시민들이 아주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콜로세움에서 엿본 고대 로마의 문명의 흔적을 따라 이번에는 포로 로마노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베스타 신전이 처음 눈에 들어온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본래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그려질 만큼만 남은 건물의 잔해에서는 그가 견뎌냈을 세월의 무게가 느껴져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주변에 남아있는 무너진 담벼락, 기둥, 건물터를 눈에 담으며 포로 로마노의 모습을 그려봤다. 한때 로마 시민들이 신께 기도를 올리고, 재판을 열고, 투표를 치렀을 현장이다. 이곳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정치 체제, 언어, 건축물 등 수많은 분야에 걸쳐 지적 유산을 남긴 곳. 무심코 걷는 길 위에서 올림푸스 신을 모시던 신전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 가톨릭의 성지 바티칸에 닿을 수 있는 곳. 유럽,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까지 영향력을 뻗친 로마 제국이 시작된 곳. 이 모든 역사의 출발지인 고대 로마는 도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또 고대 로마의 유산과 함께 살아가는 로마는 어떤 도시일까. 위로 7대가 로마에 살았어야 로마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속에 담긴 자부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어가 끝난 뒤에는 콜로세움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눈앞에 펼쳐진 콜로세움을 보며 밥을 먹는 내내 행복했다. 콜로세움 모형에 담긴 디저트까지 훌륭했던 식사 후에는 호텔로 돌아가 그토록 바라던 낮잠을 잤다. 낮잠은 기억하던 대로 아주 달콤했다.


이전 12화 피렌체의 낮과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