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에필로그
바티칸에서 돌아와 바쁘게 가방을 싸다 보니 금세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봤다. 첫날 감동을 안겨줬던 조국의 제단과 임페리얼 포럼은 여전히 멋있었고, 오전에 바티칸에서 만나고 온 성 베드로와도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택시를 탄 이후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공항으로 가는 길 석양이 무척 아름다웠고, 출국장에 들어가서는 잠시 이별을 해야 했던 남자친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허리가 불편해 내내 뒤척이면서도 잠을 한참 자고 일어났더니 비행기는 어느새 싱가폴에 도착해 있었다.
비행기에 내려서는 익숙한 억양의 영어와 중국어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공항 문이 열리는 순간 밀려오는 더운 공기에 숨이 턱 막히는 것 또한 변한 것이 없었다.
11월의 중순을 지나고 있던 그 무렵에는 싱가폴에서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한창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태리의 찬공기를 맞으며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다 갓 돌아온 나에게 에어컨 바람 밑에서 반팔을 입은 채 트리를 보고 있는 것은 영 분위기가 나지 않고, 그렇다고 밖에서 크리스마스를 찾자니 마음도 몸도 갑갑해지는 일이었다. 결국 다시 에어컨 바람을 찾아 실내 어디로든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한 뒤 내린 최선의 선택은 에어컨과 캐럴을 동시에 틀어놓고 크리스마스 조명이 밝혀진 피렌체 밤거리 사진을 찾아보며 기분을 내는 것이었다.
북반구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해가 바뀌고, 계절이 달라지는 동안 나는 일관적인 싱가폴의 날씨가 주는 편리함에 다시 익숙해졌고, 콧물이 나올 만큼 차가웠던 바람이 남긴 감각에 매달리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러나 간혹 가다 선득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가는 날, 혹은 에어컨 바람이 유난히 센 날에는 어김없이 가을을 떠올렸다.
이태리에서 보냈던 보름의 시간이 가을이었던 건 그래서 다행이었다. 희미한 감각에 의존해 떠올린 가을 속에서 나는 레푸블리카 광장의 회전목마 앞에서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사진을 찍었고, 스패니쉬 계단에서 호텔로 되돌아가는 길에는 찬 밤공기에 섞인 군밤 냄새를 맡았다.
일 년 내내 여름인 나라에서 사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당연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을 동반하는 일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한 것은 오래지만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나만의 계절을 찾는 일이다. 가을 초입 코 끝에 느껴지는 공기 냄새가 그리울 때, 손 끝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 뜨거운 커피가 주는 위안이 그리울 때 두고두고 꺼내먹을 수 있는 추억을 준 이태리 여행은 그래서 아주 많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