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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Aug 24. 2023

43살, 유럽에서 대학원 다니기 (2)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것 일 뿐이다.


마침, 강의실 문이 열리고 교수가 들어왔다.

금발의 짧은 쇼트커트, 갈색의 눈, 동유럽 악센트가 강한 영어를 구사하는 바이도비치 교수는 마치 '단호함'이 무엇인지, '엄격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강의실도 못 찾아 허우적 되는 우리에게 개강 첫날부터 과제를 내 준 위인이니 말이다. '친구를 잘 사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그녀의 등장과 함께 파도처럼 쓸려갔다. 다행히 걱정의 총량은 존재한다. 다만 더 큰 걱정이 작은 걱정을 대체한다는 것을 전제로.


출석부를 보며 학생의 얼굴과 이름, 국적을 꼼꼼히 확인한 그녀는 바로 과제와 관련된 질문을 퍼붇기 시작했다. 해당 수업은 영화와 문학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 논의하는 'Adaptation'으로 첫 주의 과제는 "제인 오스틴의 장편 소설 오만과 편견을 읽고, 각기 다른 시기에 제작된 세 편의 동명 영화를 보고 문학과 영화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오는 것"이었다.

 

설마설마했다. 개강 첫날 첫 수업이니, 대충 수업 소개하고 끝나겠지 하고 생각했다.

교수는 질문을 퍼 붓기 시작했고, 열다섯 명 안팎으로 보이던 학생들은 처음에는 우물쭈물해 보였지만 바로 손을 들고 토론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나는, 준비했던 것을 한마디도 못했다. 20년을 역행해서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첫날, 나는 강의실조차 제대로 못 찾아 헤매었다. 더욱이, 며칠에 걸쳐 성실히 준비했던 과제는 수업 중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묻혔다.


그렇게 첫 수업이 끝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실망 혹은 좌절하지는 않았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왔다는 기대와 설렘에 찬 물을 확 끼얹은 느낌이랄까?  텅 빈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학교 학사 시스템 'Neptune'에서 오늘 수업에 대한 성적이 입력되었다는 메일이 왔다.


Week 1: 출석 1점
WeeK 1: 수업참여 0점


빵점을 받았다. 생애 최초로.

좌절감과 수치스러움이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올라왔다.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잘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어린 시절 복숭아 털 알레르기가 올라와 응급실에 실려갔던 그날처럼 하늘이 빙빙 돌았다.

  

빵점의 효과는 대단했다.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어졌다. 다음 수업부터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수업 시간에 손들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오늘의 '못함'을 지워내리라. 바로 책상에 앉아, 밤새 다음 날 있을 수업의 리딩 과제를 읽고 써머리 했다. 더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수업에 참여하리라 다짐을 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는 트램에서 요약본을 보고 또 봤다.


교수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 교수가 출석체크도 안 하고 바로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 시간 동안 과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교수 혼자 떠들고 수업이 끝났다. 거의 밤을 새워가며 준비했던 내 요약본은 물거품이 되었다. 물론 수업 후, 학사 시스템에서 어떤 이메일도 오지 않았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거지? 자책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해 내지 못한다는 자책은 좌절로 이어졌고, 나는 스스로를 루저로 만들었다. 몇 주 지나고 알게 되었다. 오락가락했던 수업의 방식은 내가 못해서가 아니라, 교습 방법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곳 동유럽 대학에서는 교습 방법에 따라 수업의 종류가 2가지로 나뉜다.

모든 수업은 세미나와 렉쳐 수업으로 나뉘는데, 세미나는 말 그대로 학생들의 매우 적극적인 참여를 전제로 하는 수업이고, 렉쳐는 교수가 100% 강의 준비를 해와서 가르치는 일방형 수업이다. 그러니까, 개강 첫날 들었던 Adatpation 수업이 세미나 수업의 전형이었고, 개강 다음날 들었던 수업은 렉쳐 수업이었던 것이다. 세미나 수업은 철저한 출석체크, 과제 숙지의 여부, 그리고 수업 참여와 기말 에세이가 매우 중요한 반면, 렉쳐 수업은 출석 확인은 아예 없고 주어진 수업자료를 토대로 중간, 기말고사만 잘 보면 성적이 잘 나오는 수업이다.  


한주, 두 주 그리고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낯설었던 헝가리 대학의 시스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처음에 받았던 0점은 '나의 무능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43살에 20대의 학생들과 함께 앉아서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낯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었던 것뿐이다.  


나는 첫날 수업 참여에서 빵점 받았던 엄격하고 단호하기로 악명 높은 바이도비치 교수의 Adatpation 수업에서 점차 점수를 받기 시작했고, 이후 만점 그리고 가끔씩 만점을 넘는 점수를 받기도 하며 수업의 토론을 이끌었다. 5점(A학점)을 받기 힘들기로 유명한 바이도비치 교수의 모든 수업에 나는 5점을 받았다. 논문제출하고 국가시험을 보는 날, 질의 교수로 마주한 그녀는 시험이 끝난 후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It was a great pleasure to study with you.' 말하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로 악수를 청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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