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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Jan 06. 2022

43살 유럽에서 대학원 다니기(3)

무조건 손을 들어야 한다.

한 학기가 지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많은 이야기와 추억을 남긴 채.


작년 8월 초에 부다페스트에 와서 집 구하느냐고 고생하고, 9월 초 학교에 적응하느냐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제 막 정신 차려보니, 2022년 1월이다.


마흔이 넘어 다시 돌아간 학교, 가르치는 선생이 아닌 학생으로 돌아가니 이것저것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미국이나 한국과는 또 다른 학사 행정시스템에 적응하는 것부터, 동유럽 악센트가 강한 교수님들의 영어를 알아듣기까지 정말 뭐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었다.


'우리 때'라고 하면, 너무 늙은이 티 내는 것 같아서 가급적 삼가려고 했으나 뭐 그게 나의 모습이니 그냥 그대로 쓰려고 한다. 96학번이었던 나의 시대에는 수강신청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들어야 하는 전공 필수와 교양 몇 개 선택하면 자동적으로 등록이 되는 시스템이었고, 2000년대 초반 대학원을 다닐 때도 수강신청 때문에 걱정했던 적은 없다. 그런데 거의 20년 만에 돌아온 학교, 여기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대학원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그냥 나만 몰랐다.

수강 신청하는 날이 전쟁이라는 걸.


학사 행정시스템에서 2021년 가을학기 열린 과목들의 강의계획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등록을 하려고 하니 세상에나 정원이 마감된 것이 대다수였다. 헝가리 대학원에서는 석사과정에서 120학점을 들어야 해서 한 학기에 7~8과목을 수강해야 하는데, 수강신청부터 못했으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중에 동기들과 현지 학생들을 통해 들은 정보에 의하면, 수강신청이 시작되는 날은 어디 가지 말고 랩탑 앞에 딱 달라붙어서 수강 신청 가능한 모든 과목을 다 등록해 놓고, 그게 20개가 되든 30개가 되는 일단 다 등록해서 자리 먼저 차지하고 그 후에 강의계획서를 읽고 드롭하면 된다는 거다.


'그랬구나, 요즘은 수강신청이 이렇게 난리구나.'    


결국 수업을 듣고 싶은 과목 교수님들께 이메일을 보내, 해당 학과 학생이고 당신의 강의가 필수 수업이어서 꼭 들어야 하니 추가 등록을 받아달라는 이메일을 쓰고 수강신청이 가능했다. 교수님이 수고스럽게도 타 전공 학생에게 수강신청 드롭하라는 이메일을 보낸 후 자리가 생겨 간신히 등록할 수 있었다. 수강 신청하는 것부터 이렇게 난리부르스였으니 수업은 또 오죽했을까.


내가 다니는 헝가리의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는 1635년도에 개교한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로 유럽 안에서도 유명한 학교이다. 전통이 있는 학교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것이 없다. 석사 1학기 때부터 지도교수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논문 방향에 대해 상의하는 논문 컨설테이션 수업에서부터 세미나, 렉쳐, 프랙티스로 나뉘는 수업을 선택해서 수강해야 한다.


세미나 수업은 말 그대로, 학생들과 교수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전제로 한다. 수업 전에 읽고 와야 하는 텍스트와 영화를 미리 읽고 수업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한다. 나는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있어서, 당연히 많은 양의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수업에 참여해야 했는데 특히 재미있었던 수업은 어탭테이션(Adaptation)이었다. 드라마(희극/비극), 소설, 만화, 게임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들을 보고 문제점을 찾는 수업이어서, 영화는 물론이고 원본의 소설을 꼭 함께 읽어야 했다. 첫 수업에 반지의 제왕을 했는데, 톨킨의 그 대서사의 장편소설을 일주일 만에 다 읽고 영화를 보고 비교, 대조해서 수업에 참여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일주일의 데드라인 안에 오페라의 유령을 읽고 각기 다른 시대에 각색된 3편의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기도 했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 배트맨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자에 이르기까지 원본의 소설을 읽고 (그래도 소설을 좋았다. 만화책까지도 이해 가능, 그런데 컴퓨터 게임을 각색한 영화들은 정말 게임을 1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토론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에이, 그냥 대충 유튜브에서 리뷰 보고 대충 수업 들어가면 되지 뭐.'

그런데, 이런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 교수가 매 시간 쪽지 시험을 보고 그 결과가 성적에 반영된다. 책을 읽었는지, 영화를 진짜 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쪽지시험의 문제는 책과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 묻는다. 안 읽고, 안 보고는 진짜 알 수 없는 대답들이다. 그리고 마흔세 살에 다시 공부하면서 요령을 피울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이건 스무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영화와 책에 대한 쪽지시험을 열 문제씩 풀고 나면 수업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100점 만점에 수업 참여가 40점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체크하겠어하는 생각도 들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교수가 학생들의 코멘트 하나하나를 종이에 적으면서 점수를 매긴다. 무조건 손을 들어야 한다. 교수가 질문을 던지면 무조건 손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조차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모두 좋은 학점을 기대하기에 수업은 또 손들기 전쟁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손 들기 전쟁이 시작된다. 처음엔 수업 분위기가 너무나 당황스러워 어찌해야 하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두 번째 수업시간에 정말 한마디도 안 하고 있었더니, 교수가 해당 수업 참여점수를 진짜 빵점을 주었다. 빵점이라니, 빵점이라니. 내 인생에 빵점이라니. 매주 쪽지시험 점수와 수업 참여점수가 학사 시스템에 올라오니 오기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유럽,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온 학생들과 에라스뮈스 교환학생들은 부끄러움도 없나 보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했기에 그들은 아마도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아 보였다. 심지에 영화 이론 동기 중 한 명인 오라즈는 교수가 설명을 할 때도 손을 안 내린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수업 중에 계속 손을 들고 있다. 영화 이론 동기 중에 다행히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 영국에서 온 소피, 운 좋게 오리엔테이션 날 그녀를 만났고 둘 다 결혼을 했다는 공통점과 오랜만에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공통점에 금세 친해졌다. 소피는 학부 때 영문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영국 헤리티지 영화에 나오는 여성의 재현에 대해 논문을 쓴다. 차분한 성격, 예의 있는 그녀의 태도와 영문학을 전공한 박식함에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둘 다 그리 나대는 성격이 아니기에 수업시간에 조용한 편인데, 이렇게 학점을 주는 분위기이니 둘 다 나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소피도 푸념을 했다.

'켈리, 영국에서 학교 다닐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다들 말을 못 해서 안달이지?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아? 요즘 학생들은 다 이런가?'


다행히 한 달 정도의 적응 기간이 끝나자, 연륜(?)으로 알아차렸다. 다들 손은 들고 말은 많이 하는데, 깊이 있는 내용은 없었다. 유튜브에서 들은 얄팍한 이야기, 깊이 없는 카더라 통신에서 들은 말들이었다. 그리고 조금 철학적인 질문이나 이론적인 질문들이 나오면 매우 조용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했다. 철학적 질문(사실,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매우 좋아함)에 대답을 하면서 교수님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소피 역시 수업의 뒤로 갈수록 좋은 답변을 하며 수업의 분위기를 함께 이끌어 갔다.


이렇게 7과목을 들으니 한 학기가 금방 지나가지 않을 리가 없다. 12월 중순 공식적으로 수업은 종료되었고 시험기간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경우, 기말고사나 기말 페이퍼는 학기말에 보거나 내는 것이 정상인데 여기 유럽은 다르다. 12월 중순 수업은 끝나지만, 기말 페이퍼나 기말고사를 준비할 기간을 따로 생각한다. 교수마다 달라서 12월에 바로 기말 페이퍼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1월 초까지가 데드라인이고 시험을 보는 경우 1월 15일이 데드라인이다. 그렇게 나는 방학 아닌 방학을 보내면서, 도서관에서 기말고사와 기말 페이퍼를 준비하고 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난다. 사회생활을 할 때 대학생들에게 했던 말.  


'학생 때가 편한 거라고. 돈 내고 학교 다닐 때가 편하지 돈 받고 회사 다니는 것 정말 힘들다고'        


근데, 다시 학생이 되어 보니. 내 말이 틀렸다.

그렇지 않다. 어느 자리이건, 어떤 위치이건 절대적으로 쉽고 편한 것은 없다.

다시 학생이 되어보니, 그들의 현실이 직장인의 현실보다 쉽다고 편하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회사가 전쟁터이고 헬이면 여기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대학생 때가 좋았지 하고 생각하시는 90년대 학번분들이 계시다면...

그리고 주변에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 있다면 "그때가 좋을 때다~!"이런 말을 하지 마시고

그냥 맛있는 밥이나 한 끼 사주고 '고생 많다. 잘하고 있다' 한마디 해주면

꼰대가 아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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