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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Jan 24. 2022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

갑자기 인싸가 되었다.

부다페스트가 낮보다 밤이 길어질 무렵인 작년 초겨울쯤,

학기말 페이퍼와 발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무렵

학교 홍보처에서 이메일이 왔다.






"친애하는 Kelly,

학교 홍보를 위해 전 세계에서 온 학우들을 학교 공식 인스타 그램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학원 조교로부터 당신을 추천받아 연락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한국 대표로 소개하면 너무나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괜찮으시다면, 사진 몇 장과 자기소개를 짧게 적어서 회신 부탁드립니다....."






이메일을 읽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 귀찮아. 안 그래도 공부해야 할 것 많아서 1시간을 금쪽같이 쓰고 있는데, 왠 인스타야. 인스타는..... 대충 못하겠다고 이메일 보내야지.'


중앙 시장에 위치한 푀밤 역에서 2번 트램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혼자 창밖을 보면서 쫑알댔다.


'이번 역은 므파 국립 아트센터 역입니다.'라는 트램 방송이 나오고, 속으로 이제 헝가리어로 교통방송은 알아들을 수 있다는 희열에 발걸음이 한껏 들떠 총총총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학교 조교인 레죄 얼굴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면,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진다는 게 맞다.


'아, 학교 홍보처에 레죄가 날 추천했겠지. 레죄가 장학금 받을 때 엄청 친절하게 잘 도와줬는데. 거절하기 좀 미안한데. 그리고 또 이게 나한테까지 오퍼가 온 거면 학교 홍보처는 또 얼마나 많은 거절을 당한 거야. 학교에서 행정조교로 일하는 거 엄청 성가시고 힘든 일 많을 텐데, 나까지 또 안 한다고 하면.. 아..... 어쩌지.....'


이런 오지랖의 세상이 펼쳐진다.

괜히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늙은 학생인 나는 이렇게 인스타에 자기소개를 보내게 되었다.

20대에 학교 다닐 때는 절대 안 했을 일을.....

집에 와서 남편 J에게 이야기를 하니, 학과 조교 출신답게 잘했다고 한다. 괜히 조교들 힘들게 하지 말고 인스타 뭐 그게 별거냐며, 아무도 안 보니까 대충 사진 몇 장 보내고 간단하게 써서 보내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 사진을 찾아보는데 적당한 사진이 없다.

인스타용 사진들을 보면 다들 엄청 이쁘고 잘 생기고 블링블링 뽀 샤샤 하던데 이걸 어쩌지.

블링블링 뽀 샤샤는커녕 아예 사진이 없다. 그나마 얼마 전에 공연 보러 가서 찍은 최근 사진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아, 얼른 몇 장 추려서 보내고 말아야지. 이걸 누가 얼마나 보겠어? 얼른 정리해서 보내고 공부해야지...'


사진을 몇 장 추리고, 자기소개 글을 쓰면서 갑자기 사심이 생겼다. 학기 중에 필수로 기초 헝가리어 수업을 듣고 있으나, 아무래도 문법 위주의 수업인지라 스피킹이 부족했다. 겨울방학에는 헝가리인 친구를 사귀어서 헝가리어 연습을 좀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서 자기소개 마지막 어구에 "한국어, 헝가리어 언어교환하실 분은 제 인스타로 연락 주세요." 남겼다.


이메일을 보내면서도 그렇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겨울 방학에 따로 헝가리어 학원을 다녀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학기 말이 다가오는 12월의 어느 날.

나는 어김없이 운동화에 스키니 진, 회색 후드에 롱 패딩을 입고 집과 학교를 오고 갔다. 다시 학생이 되니, 멋 낼 일도 없고 공부하기 편안한 옷이 최고였다. 아침에 뭐 입을까 괜히 고민하느냐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사실, 회색 후드는 J의 것이다.

내가 매일 일찍 일어나 훔쳐 입고 학교로 달아났다.


'흐흐흐'


나만 그런가? 남편의 옷을 뺏어 입는 재미는 아주 쏠쏠하다.

나에게 아주 큰 J의 후드는 너무나 편안하다. 그리고 좀 느끼한 이야기지만 J의 옷을 입고 있으면 J와 함께 있는 듯한 안도감이 든다.  


그래서 J가 항상 너무 크다며, 자기가 하나 사 줄 테니 제발 돌려달라고 해도,

이런 게 '오버핏' 이라며 놀리고는 절대 후드를 돌려주지 않았다.


이날도, 이렇게 J의 후드를 훔쳐(?) 입고 거북이 등딱지 만한 백팩을 메고 학교로 갔다.

오전 8시 20분에 있는 헝가리에 수업에 들어가는데, 교수님이랑 같은 반 애들이 모두 다 나를 쳐다본다.


'어라, 뭐지? 나 마스크 안 썼나? 어? 얼굴에 뭐 묻었나?'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모두 합창을 한다.


"Kelly! 인스타그램 봤어!"


'아, 그랬구나. 그게 이제 올라갔구나'하고 생각하고 하던 대로 공부했다.

수업 끝나자, 교수님이 헝가리어 더 잘하고 싶냐고 친절하게 물어보면서, 켈리 너라면 잘할 수 있다고 응원을 해주어서 감사하다 이야기하고 학교 카페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잉? 뭐지?'


아침부터 내 인스타그램이 난리가 났다.

내 인스타그램은 난리가 날 수 없는 인스타인데....

인스타의 철학과 정 반대로 가는 계정이 내 계정인데.

얼마 안 되는 나의 지인들만 팔로우하는 굉장히 폐쇄적이며 재미없는 무자극 노쇼 인스타인데...  


'헉~뭐야? 이게 뭐야? 무슨 메시지가 이렇게 많이 왔지? 헉. 팔로우 요청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헉.... 헉... 헉...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카페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동기들이 나를 보더니 학교 인스타에서 나를 봤다고 이야기를 한다.

학교를 돌아다니는데, 이상하게 나를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느낌이다.


'아~~~~~~~~~~~~~~~~쪽팔려~~~~~~~~~~~~ 옷 갈아입고 올걸............. 화장도 좀 하고...... 아..... 창피해. 인스타그램 뭐야. 이거 사람들 다 보 나봐..... 나만 안 봤나 봐...ㅜㅜ..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네.....'


평소에 대화를 거의 안 하던, 친구들도 살갑게 다가와서 말을 건다.

한국문화가 어쩌고 저쩌고, 자신의 팔로우하는 한국 유투버에서부터 K-pop,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주변에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 정말 이게 한류구나, 문화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어떤 정치도 어떤 경제적 파워도 할 수 없는 일을.....


집에 와서 인스타를 살펴보니,

같은 학교 다니는 헝가리 친구들 뿐만 아니라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는 많은 헝가리 분들이 메시지를 주셨다. 언어 교환하고 싶다고. 서로 자기들이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고 한국어를 얼마나 배우고 싶은지 경쟁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면서. 심지어 몇 분은 엄청나게 유창한 한국어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밤, 나는 J에게 후드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기야, 나 뭐한 거야? 그거 있잖아. 인스타.... 그거 우리가 생각하는 거랑은 다른 것 같아.

나 도대체 뭐한 거야?"  


"나, 뭐 막.... 인싸? 뭐 이런 거 된 거야?"


J가 놀린다.


그렇다고.


그래, 그렇게 나는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인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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