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파 음악의 시작
후기 바로크 시대에는 고전주의 음악을 형성하는 중요한 세 가지의 기본적 표현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음악상의 로코코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갈랑 양식(Gallant style)’이었다. 18세기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반영한 갈랑 양식은 대위법적인 수법에서 화성적 수법으로의 음악적 이행기였으며, 섬세하고 우아한 멜로디와 단순한 형식, 세속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을 지닌 소곡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두 번째는 ‘감정과다양식(感情過多樣式, Empfindsamer Stil, 또는 다감양식)’이었다.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정표출을 지향한 감정과다양식은 18세기 후기에 북독일에서 처음 일어났다.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특징은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 질풍노도(疾風怒濤)으로,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계몽주의에서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에 걸쳐 과도적인 역할을 한 예술운동을 뜻한다. 이들은 유희적 감정이나 장식이 많은 로코코 양식에 반대하여 생겨난 예술양식으로, 음량변화의 대담한 대조효과와 강렬하고 도약적인 멜로디의 흐름 등을 특징으로 갖고 있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 양식의 흔적은 슈베르트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작품에까지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고전파의 음악의 시작은 자연스러움과 단순성, 보편성을 강조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베토벤처럼 강렬한 예술가의 독창성과 작품성이 강조되었다. 고전파의 음악적 특징으로는 소나타가 교향곡이나 실내악에서 연주될 때 알레그로-안단테-미뉴에트-알레그로의 4악장의 구성으로 고정되어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의 성장과 함께 비중이 커졌고, 제3악장에는 바로크 시대의 춤곡이었던 미뉴에트가 자리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분야에서는 현악기를 주체로 하는 근대적인 2관 편성 형식이 최초로 형성되었다.
건반음악에서는 쳄발로나 클라비코드보다 피아노의 사용이 늘었다. 그리고 주제를 유기적으로 전개하는 '주제노작(主題勞作: 음악 소재를 유기적 통일체로 짜맞추는 작곡기법)'원리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의 여러 가지 악곡형식을 낳았다는 점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고전파 작곡가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을 작곡하여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완성한 대음악가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759년 보헤미아의 칼 폰 모르친(Karl von Morzin) 백작의 궁정악장(宮廷樂長)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 희유곡(嬉遊曲: 귀족들의 기분전환용 무도곡)을 작곡하였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인 헝가리의 귀족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의 관현악단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충실한 악장 하이든과 단원과의 사이는 매우 원만해서, 교향곡 외에도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많이 썼다. 특히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 실내악과 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서 고전 시대 음악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 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안 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친분이 있던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하이든이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 1827년)
1770년 본(Bonn)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아버지와 그 친구들로부터 피아노를 중심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꿈은 아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 음악가로 만드는 일이었다. 베토벤의 작곡 재능을 인정하고 본격적인 지도를 한 것은 궁정 오르간연주자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였다. 그는 교육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돌봐 주었으며, 겨우 13세인 베토벤에게 부궁정 오르가니스트의 지위를 주고 제2의 모차르트로 세상에 소개했다.
베토벤은 1795년 25세의 나이로 최초의 공개 연주회에서 자작곡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젊은 마이스터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 시기는 베토벤의 창작 제1기의 시작이었다. 유명한 ‘7중주곡’ Op.20, 6곡의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Op.18, 피아노 소나타 ‘비창’ 등의 중요 작품을 끊임없이 작곡한 베토벤은 34세이던 1804년에 나폴레옹 1세에게 바칠 교향곡 제3번 ‘영웅’을 완성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취임 소식에 분노하여 이것을 파기했다.
1806년부터는 ‘바이올린 협주곡’, 현악 4중주곡 ‘라주모프스키’, ‘교향곡 제4번’, ‘피아노 협주곡 제4번’, 관현악 서곡 ‘코리올란’, 피아노 소나타 ‘열정’, 교향곡 제5번 ‘운명’, 교향곡 제6번 ‘전원’ 등 세기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작곡했다. ‘교향곡 제7번-웰링턴의 승리’(일명 ‘전쟁 교향곡’)의 대성공으로 베토벤의 세속적인 명성은 높아졌지만, 이미 그의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 시기에 작곡한 ‘장엄미사’ 이후에 런던의 필하모니로부터 새로운 교향곡을 의뢰받은 베토벤은 고향에서부터 품고 있었던 ‘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시인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의 장편시(詩) ‘환희에 부쳐 (An die Freude)’ 음악화의 소망을 이루게 된다. 최후의 위대한 대작으로 불리는 교향곡 제9번 ‘합창’(1824)은 이렇게 해서 탄생 된 것이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 고전파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일생을 거의 전속악사로만 보낸 하이든이나 봉건적 교회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차르트에 비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에 의한 해방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독창적으로 음악활동을 하였다. 빈 고전파는 베토벤이 이룩한 음악의 형식적 완성과 내용의 숭고함 속에서 양식의 정점을 형성함과 동시에 낭만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
하이든과 베토벤이 인간적인 노력 끝에 탄생한 천재였다면, 하늘에서 내려준 단 한 명의 음악천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였다. 1756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세 살 때부터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고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했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운 모차르트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서 작곡하는 법과 지휘법을 배웠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처럼 따른 바흐의 음악 교육은 모차르트가 사후까지 수많은 걸작 교향곡을 남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여덟 살에는 첫 번째 심포니를, 열한 살에는 첫 번째 오페라를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36년의 짧은 생애동안 오페라 약 27곡, 교향곡 약 67곡, 행진곡 약 31곡, 관현악용 무곡 약 45곡, 피아노 협주곡 약 42곡, 바이올린 협주곡 약 12곡, 회유곡 약 40곡, 그 외 독주곡, 교회용 성악곡, 실내악곡 칸타타, 미사곡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600 여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을 발전시켜서 대중화시킨 큰 공적을 이루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당시의 각종 음악 양식을 모두 흡수하여 여기에 개성의 심오한 특성을 반영하여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표현함으로써 음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향곡은 그 개성적인 창작이 베토벤에게 이어졌고, 가극은 베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베토벤은 그의 지인에게 자신은 결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으며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마술 피리를 주제로 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차를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1781년 빈에 정착한 뒤부터 하이든과 교류하였으며 그는 1782년부터 1785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하이든 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경의를 표한 바 있다.
모차르트는 ‘마적’과 클라리넷 협주곡을 작곡한 1791년에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 마지막 곡 ‘레퀴엠(진혼곡. 鎭魂曲. Mozart, Requiem In D minor K. 626)’을 미완으로 남긴 채 36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