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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Oct 05. 2017

결혼은 인생의 시작일까, 무덤일까

현대의 결혼문화와 전통혼례에 관한 고찰

'트랜드(Trend)’란, 동향, 영향, 유행 등을 뜻하는 말로써, 인간이 타인과 함께 의식을 공유하는 사회적 동물임을 증거 하는 동시에 그 '사회'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되어가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겪는 수없이 많은 사회적 현상들에 시대적이거나 정치적인 혹은 환경적인 트랜드를 따르게 된다. 한때는 유행했던 음악이 올드팝이 되고, 엄마들이 입고 다녔던 판탈롱 바지는 와이드진이나 부츠컷진으로 변했다. 동네마다 약수터가 있어 새벽이면 목에 수건을 하나씩 두른 아버지들이 런닝셔츠 바람에 헛둘헛둘 운동을 하며 플라스틱 통에 물을 받아오시던 것도 옛일이 되었고,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심의 하늘을 장악하는 미세먼지 덕분에 집집마다 공기 청정기를 설치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었다.

대학생들이 목을 놓아 부르짖었던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취준생들의 치열한 취업준비시험공부에 쏟아지고 개인의 사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지금은 정치적 참여보다는 사적인 욜로(YOLO) 라이프에 더 관심들을 가진다.


‘나’와 ‘너’의 구분이 분명하고 SNS상의 소통이 편리하며 얼리어댑터가 되어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들은 혼밥족과 1코노미를 유행시켰고 여기에 이제 비혼족(非婚族)마저 가세하여 결혼의 풍습까지 트랜드화 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요즘 30대의 41%는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혼’이란 결혼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적인 사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현대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인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위축되는 청년세대는 부모에게 의지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그만큼 사회적으로 성숙하는 시기가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투자하는 소비 트랜드는 더 강해지면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자기애(自己愛)’의 시간에 큰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장차 타인과 모든 것을 나누고 공유해야하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화두가 막막하거나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혼족을 양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거나, 황혼의 부부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이슈로 떠오르는 것이 ‘졸혼(卒婚)’이다.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졸혼은 이혼은 하지 않되, 서로의 생활을 인정하며 혼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인 우리나라에서 가정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으면서 각자 남은 인생을 걸어가는 대안으로 환영받는 추세이다.


한국인들의 전통 혼례법



과거 우리 조상들은 결혼이란 인륜지대사요 어른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라 생각하여,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상투를 틀지 못하고 아랫사람 대우를 받아야했다. 결혼은 혼인(婚姻)을 맺는다는 뜻이다. 혼인의 ‘혼(婚)’은 남자가 저녁에 여자를 맞이하러 간다는 것이니 남자가 장인의 집(丈家)으로 간다는 의미이고, ‘인(姻)’은 여자의 집에서 남자를 만나도록 시집(媤宅)으로 보낸다는 의미다.

원래 한국의 전통 혼례식에는 주례가 없었다. 단지 결혼식의 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사회자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대의 결혼식에서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이 주례로서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결혼의 의의나 당부의 말을 전한다. 이는 현대 한국이 근대화하면서 전통 예식과 기독교 문화의 전통이 결합하여 생겨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는 두 볼에 붉은 반점을 찍거나 붉은 종이를 동그랗게 오려 붙인다. 이를 연지곤지라고 부르는데, 두 볼에 찍거나 입술에 바르는 것을 연지라 하고,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 위쪽의 이마에 찍는 것을 곤지라 부른다. 음양론에 따르면, 붉은색은 삶의 세계인 양에 속하기 때문에, 어둠의 세계인 음에 속하는 귀신은 붉은 색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결혼식 날 신부의 얼굴에 붉은 점을 찍어서 시집 장가 못 가본 처녀귀신과 총각귀신의 시샘을 막고 좋은 혼례를 마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국의 전통 결혼식에는 많은 상징들이 사용된다. 혼례상 위에는 여러 가지 음식과 물건들이 놓이는데, 상 위에 올려놓는 닭 한 쌍은 암탉은 다산을 나타내고, 수탉은 처자식을 부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추는 불로장생을 의미하고, 밤은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표시이다. 명태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수호물의 역할을 한다. 사철 푸르른 소나무는 변치 않는 마음, 대나무는 곧고 강인한 지조, 과실이 풍성하게 열리는 동백나무,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등은 다산을 각각 상징한다.

원래 폐백은 결혼을 하고 나서 신랑의 집에서 첫날을 지낸 후 새벽에 시부모에게 드리는 인사였다. 이때 시어머니는 대추와 밤을 여러 개 집어서 신부의 치마로 던져준다. 대추와 밤은 다산의 상징이며,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매서운 시집살이의 시작을 예고하는 풍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추의 조는 ‘일찍’(早=棗)의 의미이고, 밤의 율은 ‘전율’의 율(慄=栗)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추와 밤을 며느리에게 던져주는 시어머니의 손짓에는 ‘일찍 일어나서 일하고, 두렵고 떨리는(전율스러운) 마음으로 항상 시집식구들을 공경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결혼풍습


삼국시대에는 ‘서옥제(壻屋制)’라고 하여, 신부의 집에 작은 별채를 짓고 그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여 자식을 낳고 장성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남편은 아내와 가솔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다. 또한 신라와 고구려에서는 여성이 자신이 받은 유산이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었으며, 귀족들은 엄격히 중매의 법도를 지켰지만 일반인들은 자유연애가 흔했고, 이혼과 재혼 역시 흠이 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이혼이 자유로웠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재산권 행사가 가능했던 시대였던 만큼,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이혼이 쉬운 만큼 여성의 재혼도 쉬웠다. 뿐만 아니라 재혼을 한 여성이 차별 받지도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다처(多妻)제였고, 첩의 자식도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반면 신라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일부일처(一夫一妻)제 사회였다. 삼국시대의 취수혼(娶嫂婚)은 시동생과 형수의 결혼이었고, 고려시대까지는 이모와 조카, 남매간의 결혼도 가능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친혼인은 조선시대에 와서 금지되었다. 또한 동성동본(同姓同本) 혼인도 금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다처제뿐만 아니라, 이혼 및 재혼과 관련한 풍습도 변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지 않았지만, 1477년(성종 8년) 과부재가금지법(寡婦再嫁禁止法)이 제정되고 시행되면서 양반층은 물론 차츰 일반 서민들까지도 여성의 재혼을 금기시하게 되었다.


마누라도 바꾸는 궁합
 
옛날에 자식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등짐장수가 신세를 비관하여 못에 빠져 죽으려다가 산신령으로부터 기이한 안경을 얻었다. 집에 돌아와 그 안경을 끼니 마누라는 개 자신은 닭으로 보였다. 그는 자기 부부가 개와 닭 사이다 보니, 그동안 자식도 없었고 가난하게 살았음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다른 등짐장수부부가 하룻밤을 묵으려고 왔는데, 안경을 끼고 보니 남편은 개, 아내는 닭이었다. 그 부부 역시 자식이 없었고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 날 이후 부인을 서로 바꾸어 살았다. 그러자 두 부부 모두 아들을 낳고 많은 재산을 모으며 유복하게 되었다.



조상들은 사주에 사람의 운명이 나타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혼인 때 반드시 사주를 주고받는 풍속이 있었다. 신랑 될 사람과 신부 될 사람의 사주를 가지고 궁합을 보아서 두 사람이 혼인하기에 적합해야 혼사를 진행했다. 정혼(定婚)한 뒤에는 신랑 될 사람의 사주를 적은 사성(四星)과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여자 쪽에 보냈다. 사주단자가 없으면 저승에 가서도 부부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여겨서, 여성은 신랑의 사주단자를 평생토록 장롱 속에 잘 간직했다. 그리고 여성이 죽으면 신랑의 사주단자를 관 속에 같이 넣어 묻었다.
‘궁합(宮合)’이란 용어는 중국 명나라 임소주(林紹周)가 펴낸 택일서인 [천기대요(天機大要)]중 ‘혼인문(婚姻門)’의 ‘남녀구궁궁합법(男女九宮宮合法)’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1636년(인조 14년) 성여춘(成汝椿)이 천기대요를 도입하여 간행하면서 ‘궁합’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궁합중에서 혼삼재(婚三災)는 특정 띠와 띠가 만나면 부부가 생이별하고 가산이 흩어지며 병액으로 고통을 받고 모든 일을 대망하게 된다는 악재중 악재를 말한다. 호랑이띠, 말띠, 개띠인 사람은 쥐띠, 소띠, 호랑이띠를 만나면 혼삼재가 된다. 돼지띠, 토끼띠, 양띠인 사람은 닭띠, 개띠, 돼지띠를 만나면 혼삼재가 된다. 뱀띠, 닭띠, 소띠인 사람은 토끼띠, 용띠, 뱀띠를 만나면 혼삼재가 된다. 원숭이띠, 쥐띠, 용띠인 사람은 말띠, 양띠, 원숭이띠를 만나면 혼삼재가 된다고 한다.
서로 만나면 좋은 궁합은 육합(六合)이나 삼합(三合)이 되는 관계인데, 육합은 쥐띠와 소띠, 호랑이띠와 돼지띠, 토끼띠와 개띠, 용띠와 닭띠, 뱀띠와 원숭이띠, 말띠와 양띠가 좋은 궁합이고, 삼합은 원숭이띠와 쥐띠와 용띠, 돼지띠와 토끼띠와 양띠, 호랑이띠와 말띠와 개띠, 뱀띠와 닭띠와 소띠가 서로 좋은 궁합이라고 본다.

남자가 신부의 집으로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고 성장할때까지 거주하는 서류부가혼은 조선시대 초까지 이어온 한국 고유의 혼인습속이었다. 율곡 이이는 외가집이 있는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나 여섯살에 비로소 아버지를 따라 파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조선이 중국 송나라의 주자(朱子)가 발전시킨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주자가 만든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조선 사람들이 따라야 할 ‘기본생활지침서’가 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자식들이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라는 풍속 때문에 일가친척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게 된다고 비판했고 대국인 중국의 문물제도를 올바르게 본받아야 한다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서류부가혼 제도를 반대했다. 결국 서류부가혼 제도는 1435년(세종 17년)에 채택된 친영제도(親迎制度: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올리고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혼인풍습)와 절충되어, 처가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다음날이나 3일째에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오는 반친영제(半親迎制)로 변했다. 이때부터 조선 여성들은 시집을 가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살면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악법에 시달리는 무지한 결혼제도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렇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도 결혼이란 여성들의 교환을 통한 남성집단의 통합을 위한 관례이며, 여성의 노동력이 시댁 식구들에게 착취되는 불평등한 노동계약이라는 개념이 큰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명절 이후 이혼율이 크게 늘어나는 것도 시집살이에서 비롯한 부부간의 갈등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여성은 남성의 가족에게 존대를 하며 늘 고개를 조아리고 살아야하는 여성비하의식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들을 남편 대신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분신으로 믿는 시어머니들이 존재하는 이상, 며느리와 시집간의 갈등이 부부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은 더욱 커지기만 할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도 남존여비는 여전히 존재한다. 시대가 변하면 불가분적인 도덕의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결혼은 내가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은지 나르시스트로 혼자 사는 것이 나은지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결국은 누구나 깨달을 것이다. 결혼이란 아름답지만 오래가지 않는 花無十日紅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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