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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Sep 23. 2017

핑크 플로이드와 쇼팽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음악과 영화

아침저녁마다 듣고 보는 지루한 정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보자면,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와 보수의 흑백논리로 정치성을 나눈다. 논리적인 사상과 이념에 대한 진중한 생각과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이 어느 쪽에 가까운가를 판단하기보다는 새로운 것과 오래 된 것, 그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에 따라서 진보성향과 보수성향으로 분류화시킨다. 이것은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로부터 보수는 늘 진부하며 지루하고 혁신되어야 할 대상이며, 진보는 새롭고 창의적이며 도전해야하는 어려운 과제로 여겨졌다.

1980년대 미국 음악계를 초토화시켰던 영국의 ‘New Wave Music’의 어원은 프랑스의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Nouvelle Vague)’가 시작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62년 절정에 이른 프랑스의 영화 운동 누벨바그는 기존의 안이한 영화 관습에 대항하여 감독의 개인적인 영감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방식과 스타일을 원하는 영화혁명으로,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에릭 로메르(Eric Rohmer) 등 젊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군단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이에 비해 진보적인 음악의 움직임은 영국에서 먼저 일어났다. 1960~197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프로그레시브 록은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클래식과 재즈를 접목시켜 컨셉트 앨범 지향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다. 시적인 가사와 예술성을 중시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음악이었던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을 대표하는 작품이 세계적인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여덟 번째 스튜디오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이다.

1973년 발표된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4,000만장 이상 판매되었다. 또한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미국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사이키델릭하며 아방가르드한 핑크 플로이드의 전작들에 비해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재즈를 전공한 키보디스트 릭 라이트(Rick Wright)에 의해 블루스적인 화음을 포함시키고 재즈적인 요소가 적극 가미되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은 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핑크 플로이드는 다시금 상업성을 배제하고 초창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실험정신을 살리는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산업사회에서 인간성의 부재에 대해 다룬 심도 높은 앨범 [Wish You Were Here](1975)는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적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팀의 리더였던 시드 배럿(Syd Barrett)이 1968년 탈퇴한 이후, 밴드는 로저 워터스(Roger Waters)와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 릭 라이트(Rick Wright) 3인 체제로 가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1977년 발매된 앨범 [Animals]부터는 거의 로저 워터스의 1인 체제로, 그의 사상과 트라우마에 기초하여 밴드의 모든 음악과 가사가 만들어졌다.

로저 워터스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와 정치에 대한 냉소와 자신의 이념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밴드의 음악적인 규모는 점점 커져갔고, 많은 세션 기타, 색소폰, 백보컬, 코러스, 키보드, 급기야는 대형 오케스트라까지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핑크 플로이드의 거대해져가는 음악관에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시드 비셔스(Sid Vicious)는 오디션에 'I Hate Pink Floyd'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올 정도로 비아냥거렸고, 핑크 플로이드의 복잡하고 난해한 음악은 많은 음악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모든 비난을 감수한 핑크 플로이드의 사상과 음악적 방대함은 1979년 발표 한 명반 [The Wall]에 집대성되었다. 시드 배럿을 모티브로 록가수 ‘Pink’를 주인공으로 한 록 오페라 ‘The Wall’은 2차 세계대전에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가정과 학교와 사회로부터 받은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고통 받고 결국 마음의 벽을 쌓고 고립 된다는 내용을 총 26곡의 노래에 담아 더블 앨범에 수록했다.

현존하는 최고의 컨셉트 앨범으로 꼽히는 [The Wall]은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15주 동안 머무르며 리드 싱글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가 차트 탑에 올랐고, 앨범 발매 후부터 1987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빌보드차트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은 실사/애니메이션 뮤지컬 드라마로 1982년 영국 감독 알란 파커(Alan Parker)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로저 워터스는 영화를 위해 보컬 파트를 다시 녹음했고, 레코드에는 길이 제한으로 넣지 못했던 곡 ‘What Shall We Do Now?’가 삽입되었다. 영국의 카투니스트 제럴드 스카페(Gerald Scarfe)도 제작에 참여해 그만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압도적인 영상미로 영화를 완성시켰다.

[The Wall]의 영화화에 대해 평론가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1400만 달러를 기록하며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특히 ‘Pink’역을 맡은 가수 밥 겔도프(Bob Geldof)는 추락하는 록스타의 상처 입은 내면과 헝클어지고 부서질 것 같은 외면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The Wall]이 담고 있는 인간의 소통과 부재와 절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밥 겔도프는 1986년 명예 대영 제국 훈장을 받은 아일랜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사회운동가로, 그가 ‘Pink Floyd – The Wall’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일어났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밥 겔도프와 그의 매니저는 열악한 택시운전사들에 대한 처우와 택시 요금의 개선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해 줄곧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타고 있던 택시의 기사가 바로 로저 워터스의 형이었다. 그 형은 마침 주연 배우를 찾는 오디션을 보고 있던 로저 워터스에게 밥 겔도프를 추천했고, 그는 세기의 명반과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영화감독 알란 파커는 1976년 장편 영화 ‘벅시 말론’(Bugsy Malone)으로 영화계에 데뷔하여, 1978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로 아카데미 음악상(조르지오 모로더)과 각색상(올리버 스톤)을 받았다. 그의 세 번째 작품 ’페임(Fame)’은 스타를 꿈꾸는 예술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영화로 당시 아이린 카라(Irene Cara)가 부른 ‘Fame’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최우수 영화 O.S.T로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알란 파커 감독은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수작 ‘버디(Birdy. 매튜 모딘,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1984)’와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와 미키 루크((Mickey Rourke)의 명연기를 볼 수 있는 ‘엔젤 하트(Angel Heart. 1985)’, 1960년대를 배경으로 인종차별주의의 경종을 울리는 영화 ‘미시시피 버닝(Mississippi Burning. 진 헤크먼, 윌리엄 데포우 주연. 1988)’ 등 반전과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경계와 의식 있는 작품 속에 고유한 아우라를 입히는 명연출자로 명성이 높았다. 알란 파커는 1995년 대영 제국 훈장, 2002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에 서임되었고, 2013년 ‘영국 아카데미 협회 평생공로상(BAFTA Academy Fellowship Award)’을 수상했다.


반전과 인권수호를 외쳤던 미국의 뉴웨이브 영화들 (American New Wave Cinema)
 
1970년대 미국영화계는 유럽영화들의 다분히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영상을 중요시하는 누벨바그 운동에 반기를 들고 사회와 정치적인 문제로 눈을 돌렸다. 존 슐레진저(John Schlesinger),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 샘 페킨파(Samuel Peckinpah) 등 진보성향의 감독들은 베트남전 반대시위와 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사회적 모순과 현실비판을 담아 리얼리즘을 강하게 대두시킨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알란 파커 감독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각색을 맡았던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은 영화 ‘플래툰(Platoon. 1986)’, ‘7월 4일생(Born of the Fourth Of July. 1989)’, ‘하늘과 땅(Heaven & Earth. 1993)’으로 유명한 ‘베트남전 3부작’을 완성했다.

전쟁영화의 백미로 불리는 작품 ‘플래툰’은 올리버 스톤 감독 자신이 직접 겪은 베트남전의 참혹한 현실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서사적으로 그려낸 명작이다. 톰 베린저(Tom Berenge), 윌리엄 데포(Willem Dafoe), 찰리 쉰(Charlie Sheen) 등 출중한 연기파 배우들이 생생하게 전장의 모습을 재현한 ‘플래툰’은 올리버 스톤 감독이 무려 10년의 각고 끝에 완성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1986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음향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영화 속에서 전쟁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을 잔인하게 말살 시킬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인, 엘라이어스 하사(윌리엄 데포)가 정글에 홀로남아 베트콩들에게 쫓기다가 하늘로 구원을 요청 하듯 두 손을 뻗고 죽어갈 때 비장하게 흘러나와 감동을 더해주는 음악이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이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사무엘 바버의 현악 4중주 1번의 2악장을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편곡한 작품이다. 1937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바버의 교향곡 1번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은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그에게 새로 창립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첫 시즌에 연주할 곡을 의뢰했다. 바버는 토스카니니의 제의를 받아들여 현악 4중주 1번의 2악장을 현악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작곡했다. 이 곡은 1938년 11월 5월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으며 연주회 실황은 NBC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그 후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미국 대통령과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영화 ‘플래툰’을 통해 가장 유명한 영화음악이 되었다.
 

'플래툰’이 그려내는 자국 우월주의와 인종차별, 미국의 비도덕성과는 반대로 베트남전은 미국이 흘린 정의의 수호를 위한 피였음을 주장하며, 베트남전으로 인해 상처 입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마이클 치미노(Michael Cimino) 감독의 ‘디어 헌터(The Deer Hunter)’이다.

로버트 드 니로, 크리스토퍼 워켄(Christopher Walken),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주연의 ‘디어헌터’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서 고문과 생사를 건 러시안 룰렛게임 끝에 탈출한 세 명의 친구에게 남아있는 끔찍한 전쟁의 기억과 파괴된 현실의 삶을 보여준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세 친구가 사슴 사냥을 하고 들른 클럽에서 한 친구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쇼팽의 ‘야상곡 G단조 Op.15 제3번’은 기도를 하는 듯 숙연해지며 서정에 잠기게 되는 곡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 살아 돌아온 마이클의 모습을 뒤로하며 흐르는 ‘카바티나(Cavatina)’ 기타 선율은 영화 ‘디어헌터’를 가슴에 남게 하는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탠리 메이어스(Stanley Myers)가 피아노 소품으로 작곡했던 ‘카바티나’는 기타의 거장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를 위해 기타 명곡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줄리안 브림(Julian Bream)과 함께 현존하는 최고의 클래식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 존 윌리암스는 4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유명한 재즈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에게 기타를 배웠다. 이후 이탈리아의 키지아노 음악원에 입학하여 5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és Torres Segovia) 밑에서 공부를 했고, 영국왕립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전공했다. 스승 세고비아에게 기타의 왕자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던 그는 70~80년대에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스카이(Sky)’에서 활동했고, 제인 버킨(Jane Birkin), 주디 콜린스(Judith Collins) 등의 가수들과 함께 협연하며 뉴에이지적인 음악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세네갈, 카메룬, 콩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마다가스카르 등 아프리카 민속음악을 기타로 연주한 앨범 [The Magic Box]와 2003년 베네수엘라 작곡가들의 음악을 담은 앨범 [El Diablo Suelto]를 발표했다. 존 윌리엄스는 2006년 아시아순회공연의 일환으로 20년 지기인 리처드 하비(Richard Harvey)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듀오 연주회를 펼쳤다.
 

세상은 언제나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로 진보와 보수의 선택을 강요한다. 하지만 시끄러운 사회면을 떠나서 혼자 듣는 음악에 잠겨 있다 보면 진보적인 음악이 한치 앞을 못 내다보는 젊은 혈기들의 용두사미가 아니고, 보수적인 음악이라고 해서 틀에 박혀서 지겹고 무료함만을 자아내는 옛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다.

지금 세련되고 최신의 것이라도 언젠가는 촌스러운 구식이 되어, 또 다른 진보와 혁신의 바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 가슴을 울려주는 것이고 가장 소중한 것은 오래오래 간직되는 것이라고.


진보와 보수, 단 두 단어로 결론지어지는 예술은 없다. 가사와 멜로디가 만나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시나리오와 영상이 만나 명화가 되는 것처럼, 두 시간짜리 영화가 이 십년동안 기억될 수 있는 그런 열린 가슴으로 이 가을을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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