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그 후 25년 한국 대중음악의 현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여름, 우리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영웅을 맞게 되었다. 댄스음악을 저질스럽다고 싫어하던 사람에게는 좋은 가십의 대상이 되었고, 원초적인 감성에 목말라 있던 미성숙한 혈기들에게는 충격과 모방의 워너비가 되어 준 세 명의 아이들.
1992년 4월 MBC 방송의 ‘특종 TV 연예’를 통해 심사위원들에게 '최악의 노래’라는 평가를 받은 ‘난 알아요’를 발표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순식간에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였다. 'TV 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 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거의 모든 상을 휩쓴 히트곡 '난 알아요’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발라드와 록과 성인가요가 공존하던 대한민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일방 통일’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한국의 대중음악은 댄스 아니면 뽕짝 단 두 종류로 분류되었다.
서태지의 힘은 무서웠다. 아니, 그의 힘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던 청년들의 힘이 무서웠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3년 6월 2집 [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다시 한 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다.
독재정치와 반민주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말 할 권리를 잃고 늘 억압받는 입장이었던 젊은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 뿐 아니라 말투와 외모 들려주는 메시지와 그 밖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논리적인 사고보다 감정과 끓어오르는 혈기의 분출구가 필요했던 청소년들은 문화의 다중적인 구조를 거부하고 서태지에 의한 서태지를 위한 서태지의 방식만을 인정했다.
그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내 놓은 곡이 3집 [발해를 꿈꾸며]에 수록된 ‘교실이데아’였다. 입시와 학원 교육에 찌들어있던 아이들에게 학교라는 족쇄에 채워진 부조리함을 바꿔야 한다는 파격적인 화두를 던진 노래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교실 이데아의 공연 무대 위에서 사자처럼 포효하는 한 남자를 보았다.
'안흥찬’. 대한민국 스레쉬메탈 밴드 크래쉬(Crash)의 리더이자 보컬인 그가 짧은 스포츠 헤어스타일을 한 채(아마도 공익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베이스기타를 메고 무대의 정중앙에서 사자후를 내지르고 있었다. 한국 헤비메탈이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가요계의 메인 스트림에 나타난 것이었다.
음악 팬들은 비로소 잊고 있던 헤비메탈이라는 이름과 해후하게 되었고, 헤비메탈이라는 장르가 굳이 꽉 끼는 가죽바지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고막을 테러하는 8단 고음만을 내지르는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헤비메탈의 변혁, 그리고 크래쉬
1986년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으로 기록되는 시나위 1집 [Heavy Metal Sinawe]가 발매된 이후 부활과 백두산의 데뷔 음반이 차례로 발표되면서 한국의 헤비메탈은 2년여의 시간동안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 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국내 메탈 뮤지션들도 서서히 음반활동을 시작했고, 단대부고, 서울고, 상문고를 위시한 고교 록밴드의 활동과 한국 메탈의 개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인천의 메탈밴드들이 가세하면서 한국 메탈의 부흥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987년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부활과 백두산이 순차적으로 해산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시나위가 발표한 3집 [Freeman]이 실패하면서 한국 헤비메탈 1세대들은 정치적인 압박에 의한 잠정적인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1991년 안흥찬(보컬,베이스)와 윤두병(기타), 아영호(기타), 백창학(드럼)으로 시작된 크래쉬는 클럽 ‘록월드’와 ‘송설 라이브’ 등을 통해 앨범 발매 전부터 이미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던 스래쉬메탈 밴드였다. 1994년 발표한 데뷔앨범 [Endless Supply Of Pain]은 카르카스(Carcass)와 브루탈 트루쓰(Brutal Truth), 카니발 콥스(Canibal Corps) 등 세계적인 밴드의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리던 콜린 리처드슨(Colin Richardson)이 참여한 앨범으로, 한국 헤비메탈 역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며 국내 헤비메탈 음악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곧이어 발표한 2집 [To Be Or Not To Be]의 연이은 히트로 크래쉬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밴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음지로 숨어들었던 클럽 라이브공연을 활성화 시키고 록페스티벌 등의 대중화에도 큰 기여를 담당했다. 라이브 클럽의 성지였던 홍대에서는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과 블랙홀(Black Hole)을 선두로 크래쉬, 디아블로(Diablo), 오딘(Oathean), 사두(Sadhu), 사일런트 아이(Silent Eye), 사하라(Sahara), 멍키헤드(Monkey Head), 노이즈 가든(Noze Garden) 등 2세대 메탈밴드들의 공연이 거의 매주 열리기 시작했다.
1994년 겨울에는 미국 얼터네이티브(Alternative) 록밴드 ‘너바나(Nirvana)’의 리더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자살했다. 베르테르 신드롬 속에 유행처럼 자살과 허무주의가 번지고, 얼터록 씬이 내놓은 대안 없는 음악에 심취해있던 아이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아나키즘과 책임감 없는 낭만주의 속에서 속절없이 갈팡질팡하며 홍대로 모여들었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마치 도화선에 불을 그은 것처럼 시애틀 록과 그런지 펑크음악의 폭발적인 유행을 가져왔다. 딱 달라붙는 옷에 가죽 부츠와 윤기 흐르는 긴 머리로 풍력 발전을 일으킬 만큼 강력한 풍차 돌리기를 선보이던 헤비메탈 선배들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거지같은 옷을 입고 제자리 뜀뛰기를 하며 반주와 음정이 어긋날수록 더 신이 나서 광란의 슬램(몸부딪히기)를 해대는 펑크밴드들에게 속절없이 밀려났다. 시대가 달라졌다. 서태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1995년 10월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과 ‘필승’을 선보이고 충격적인 그룹 해체와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던 서태지가 은퇴한지 3년 만에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1998년 7월 발표 한 얼터너티브 록 앨범 [Seo Tai Ji]는 제목이 없는 6곡의 노래와 3곡의 간주곡이 담긴 28분짜리 소형 음반이었지만 1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서태지의 공백이 팬들에게 미친 서태지식 문화의 갈증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2000년 8월 ‘문화 대통령’ 서태지는 6집 [울트라맨이야]로 복귀했다. 서태지의 빨강색 레게 헤어스타일과 압도적인 비주얼응 한 서태지 밴드의 연주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뉴 메탈(Nu Metal)이라는 생소했던 장르가 순식간에 일반화가 되면서 미국의 뉴 메탈 밴드인 콘(Korn)과 림프 비즈킷(Limp Bizkit)을 연상시키는 음악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서태지는 ‘20000909 서태지 컴백콘서트’로 대대적인 복귀를 알렸고, 2001년부터는 ETPFEST(Eerie Taiji People FESTival: 괴기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라는 대규모 록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예당 엔터테인트먼트에서 주관한 2002년 ETPFEST에는 록밴드 스키조가 오프닝 무대를 열었다. 타카피, 45rpm, 트랜스픽션(TransFixion), 넬(Nell), YG패밀리, 리쌍, 피아(Pia), 디아블로가 이틀 동안 공연을 했고, 미국 뮤지션으로는 머틀리 크루(Motley Crue) 의 타미 리(Tommy Lee)가 참여 했으며 일본 뮤지션으로는 도브헤즈와 영상으로 엑스 재팬(X-Japan)의 히데(Hide)가 참여하였다.
2004년 7집 음반 [Seotaiji 7th Issue]를 발표한 서태지는 ‘2004 Live Wire’에서 세계적인 뉴 메탈 밴드 콘과 피어 팩토리(Fear Factory) 등 유명 해외 뮤지션과 합동 공연을 벌여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2008년에는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더 유즈드(The Used), 드래곤 애쉬(Dragon Ash) 등이 참여한 ETPFEST를 개최하였다.
이에 자극 받은 공연 기획사들을 통해 국내에서도 국제적인 록페스티벌이 활발히 개최되기 시작했다. 1999년 세기말에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첫 국제 록페스티벌이었던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이 쏟아지는 폭우에 장렬히 수몰된 후, 록페스티벌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공연계에도 다시금 페스티벌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6년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의 후신인 인천 펜타포트 록페스티벌, 지산 록페스티벌, 동두천 록페스티벌 등이 개최되면서 국내 음악 팬들은 그동안 부러움에 몸서리쳤던 해외 유명 뮤지션들의 공연을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헤비메탈과 얼터너티브 록, 그리고 힙합과 펑크라는 장르의 파괴와 재구성으로 태어난 갱스터 랩(Gangster Rap)과 뉴 메탈, 랩 메탈(Rap Metal)들은 서태지에 의해 ‘감성코어’라는 전혀 새로운 이름이 입혀지고 유행하면서 국내 음악계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위협했다.
이미 서태지가 견고히 세워놓은 댄스공화국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기 보다는 오이를 먹으며 전보다 더 열심히 아이돌이 되기 위해 홍대 클럽과 기획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음악도 노래도 컴퓨터와 첨단 기기들이 대신하는 시대에 자라난 아이돌들은 비슷비슷한 용모에 비슷비슷한 춤을 추며 가수도 댄서도 아닌 성공한 연예인이 되기만을 꿈꾸었다. 모든 문화가 아이돌로 시작해서 아이돌로 통하는 나라, 이것이 문화 대통령 서태지가 만들어 놓은 아이돌 공화국이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음악은 K팝이라는 신조어로 명명되며 ‘한류’라는 새로운 문화를 열었지만, 그것은 마치 ‘김치’ 한 가지만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모든 음식의 맛을 비유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음악’이 가져야 할 각기 다른 음색과 장르를 댄스음악 한 가지 속에 억지로 뭉쳐 넣은 모양이 되어버렸다.
“왕과 대통령이 다른 점은 대통령은 임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불한당’에 나왔던 대사이다. 어떤 대통령은 나쁜 것을 좋게 만들고, 어떤 대통령은 좋은 것을 나쁘게 만든다. 한번 나빠진 것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좋든 싫든 그 결과물은 그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혔던 국민들이 지고 가야한다.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반이나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직도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성공하거나 버스킹으로 성공하는 두 부류의 음악만을 들어야 하는가. 왜 여전히 우리는 신들린 기타 리프와 귀청을 난타하는 드럼 사운드와 헝클어진 머리털로 헤드뱅잉을 하는 한국 헤비메탈 밴드와 뮤지션들을 록페스티벌에서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가. 왜 재즈와 클래식은 그토록 고급스럽게 보듬고 환호하면서도, 우리 가요가 지닌 다양성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자랑스럽다면 내가 성장하면서 접했던 문화 역시 자랑스러운 법이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대로 옛 것을 함께 가지고 나갈 수 있어야, 문화는 더욱 풍요롭고 다양해질 수 있다.
서태지의 영광스러웠던 25년 동안 한국 대중음악은 어떠한 길을 걸어 왔고 향하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듣고 있는 그 음악이 바로 대한민국의 음악이 가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알려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