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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Oct 02. 2018

한국의 술

술권하는 사회

신은 인간에게 물을 주었고,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
 

2017년 우리나라 인구의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은 1980년 14.8에서 10.9로 줄었으며, OECD 회원국 술소비량 순위는 8위에서 14위로 내려갔다고 하는 통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나라 시람들은 술을 많이 마신다.
애주가들은 슬플 때 술을 마신다. 기쁠 때도 술을 마신다. 우울할 때도 술을 마시고, 무료할 때도 술을 마신다.


예술인은 예술을 한다는 핑계로 술을 마시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신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청년들은 그동안 못 마신 것이 억울해서 마신다.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술 한 잔 하자.”는 말이 “우리 얘기나 좀 할까.”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다.

저녁 먹으러 모인 자리에서 진짜 밥만 먹고 나와 버리는 사람은 융통성 없는 이로 낙인이 찍힐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성인이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사회생활 역시 제대로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주도(酒道)와 주례(酒禮)


이렇게 술이 일상생활에서 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의 음주문화는 ‘주도(酒道)’를 중히 여기던 조상들의 풍습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에는 설을 맞이하는 술이라 하여 차가운 ‘세주(歲酒)’를 마셨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는 귀가 밝아지라고 하여 귀밝이술을 마셨다.

집안에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고 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복(飮福)이라 하여 제주(祭酒)를 마시고, 혼례에는 신랑과 신부가 술잔을 교환하는 합환주(合歡酒)’를 마셨다.
또한 집에 손님이 오면 반드시 좋은 술을 내어 대접했다.


식사를 할 때에는 반주를 곁들여 손님께 권하는 것이 집주인의 예의였다. 주도에 의하면 어른이 주시는 잔은 사양할 수 없었고, 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내색을 해서는 안되었다. 술상에 앉으면 대작하여 술을 서로 주고받는데, 이때 상대방의 권주잔은 반드시 다 비우고 되돌려줘야 한다. 이를 반배(返杯)라하는데, 반배는 가급적 빨리 이행하고 주불쌍배(酒不雙杯)라 하여 자기 앞에 술잔은 둘 이상 두지 않는 것이 주석에서의 예절이다.
 


서양과 동양술의 차이
 
서양 유럽의 문화권은 여름이 건조한 탓으로 목축형 식생활이 형성되어, 포도와 같이 당분을 함유한 과실을 발효시킨 과실주와 브랜디류 그리고 보리의 싹을 틔운 호프를 이용하여 만든 맥주위스키를 탄생시켰다. 반면, 계절풍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여 농경형 식생활이 형성되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농경에서 산출한 곡류에 자연적으로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을 이용한 술을 담아왔다.

우리나라 술


우리나라 전통적인 술은 크게 탁주, 청주, 소주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탁주는 예로부터 주로 농군들이 마시던 술이라 하여 ‘농주(農酒)’라고도 하고, 즉석에서 걸러 마신다 하여 ‘막걸리’, 그 빛깔이 희다고 하여 ‘백주(白酒)’라고도 한다.

탁주를 걸러내고 윗물만을 통에 담아 30일 가량 보관하면 맑은 청주가 된다. 우리의 청주제조 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져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 정종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 청주이다.

흔히 우리가 정종을 일본식으로 부른다고 알고 있는 ‘사케(酒)’는 일본말로 ‘술’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부산에 최초로 청주 공장을 세웠는데,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주 브랜드가 ‘정종(正宗)’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정종은 사케의 대명사로 여겨지게 되었다.


소주의 기원
 
알코올의 증류법은 고대 아랍의 명의인 아비케나가 발명했는데 몽골제국에서 이 증류법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소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주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몽골제국의 쿠빌라이칸이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개성과 전진기지가 있던 안동, 합포, 제주도 등지에서 빚기 시작했다. 이후 몽골이 고려와 함께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일본을 정벌할 때 안동을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안동소주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소주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 했고, 평북지방과 제주도에서는 '아랑주'라고 했다. 경상북도에서 '새주', '세주'라고도 했고 경남 진주에서는 '쇠주'라고 했다. 연천에서는 '아래지'라고 하였고 충주에서는 '알랭이'라고 불렀고 해남에서는 '효주'라고 불렸다.

고려시대 들어온 소주는 오랫동안 약용으로 음용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야 '술'로서 일반인들이 마시게 되었으며 '약소주(藥燒酎)'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슬처럼 받아내는 술이라고 하여 노주(露酒), 화주(火酒), 한주(汗酒), 기주(氣酒) 등으로도 불리었다. 소주(燒酎)는 세 번 고아 증류한 술이란 뜻으로 ‘酒’자 대신 '酎'자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고급주로 일부 특권층이 마시던 소주는 1905년 무렵부터 주로 서울 공덕동, 마포, 동막 부근에서 가내 공업 형태로 제조돼 서민에게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4년 진로주식회사의 전신인 진천양조상회가 설립되면서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소주가 대중화 되었다.
 
주당들의 세계
 
우리나라 근현대문학의 대가인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박사는 스스로를 ‘양주동이’라 부를 정도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생전 조선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 받았던 그는 맥주 한 상자를 그 자리에서 비울 정도로 맥주를 좋아했는데, 주례 요청이 들어오면 사례로 맥주 한 박스를 요구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양주동은 열한 살부터 서당 훈장을 하며 월사금으로 술 한 병씩을 받아 마셨노라고 자신의 수필집 ‘인생잡기’에 적었다. 모친의 눈을 속이고 광속에서 막걸리를 여러 사발 마셔 며칠 동안 필름이 끊어지는 ‘3일주 사건’도 적혀있다. 이러한 양주동의 선친은 단오날 만취하여 일본군 병사가 우리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꾸짖다가 억울하게 피살됐다.


빙허(憑虛) 현진건은 이러한 일제말의 광폭한 세월을 ‘술 권하는 사회’라고 기록했다. 그는 “조선사회에서 정신 바로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그렇지 못하면 술 밖에 먹을 것이 없지 않느냐”고 작품에서 항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와 부모를 잃고 울분하던 젊은 천재들이 일탈할 수 있는 방법은 술 마시고 익살과 해학으로 캄캄한 시대를 조롱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횡보(橫步)’ 염상섭 선생은 늘 술 취한 자세로 갈지자(之)로 걸어서 횡보라 불렸다.

수주(樹州) 변영로는 술에 빠져 친구의 집을 찾아가 “자네 부친이 안 계시니 대신 한잔 하세”라며 친구 부친에게 태연히 말했던 주정꾼이다. 수주는 일제가 술 판매를 통제할 때 충무로에 있는 술집 ‘금강산’이 문을 열기 1시간 전에 도착하여 선착순 1번으로 브랜디 두 잔을 사서 마시고는 돌아오는 전차 속에서 술기운이 날아갈까 걱정되어 출입구를 피해 구석좌석에서 코를 막고 귀가했다는 애주가였다.


주선(酒仙) 네 사람의 ‘산중취우(山中醉雨)’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기행이다. 공초(空超) 오상순을 비롯하여 이관구, 오상섭 등이 혜화동 변영로의 집에 모여 소주 한말과 안주를 준비하여 성균관 뒤 약수터로 올라가 술을 마시며 세월을 풍자했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이때 오상순이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먼저 옷을 벗으니 네 사람이 벌거숭이로 춤추고 노래 부르다가 언덕아래 소나무에 메어있는 황소를 보고 “소타고 내려가자”는 말에 따라 모두가 몸에 걸친 것 없는 알몸으로 소를 타고 성균관을 지나 큰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다.


앞선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들의 기행이 추태인가 광기인가 아니면 일제 강점기를 살아야했던 우리 민족을 대변해 토해내는 울분이었는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들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주정꾼’ 노릇 밖에 할 것이 더 있느냐고 역설한다. 하지만 지식인이라고 해서 비도덕적인 것을 용서받고, 천재 예술가라고 해서 모든 기행을 이해받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사람은 배울수록 뜻을 올바르게 세워야 하고 가질수록 베풀어야 하며, 지위가 높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자행하며 약자위에 군림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군사독재를 겪어오면서 우리 국민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술 권하는 사회’에 살았다. 너무도 당연시 되던 ‘주취폭력’은 이제 맨 정신인 상태에서도 사회적 약자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지고 그것이 관행이자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주취와 만취를 넘은 도취이다. 문학인 깜냥 예술인 깜냥을 뒤집어쓰고 자아도취에 빠진 못나고 흉한 지식인들이 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바뀌어 이제 주도와 예절도 현대식으로 바뀌고 있다. 아무리 동방예의지국이라도 옳지 않은 풍습은 바꾸어야 하고 맞지 않는 전통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나의 즐거움이 상대방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더 이상은 술을 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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