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요나 권장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郞の夏. 1999)
기타노 다케시, 세키구치 유스케 주연.
기타노 다케시 감독.
지난 가을 일본의 서점가는 70대 노배우의 연애소설의 열풍에 휩싸였다. 영화감독이자 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발표한 소설 ‘아날로그’는 발간 3주 만에 10만부가 판매되었다. 영화 ‘하나비(1997)’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기타노 다케시는 ‘소나티네’, ‘아웃레이지’등을 연출한 명감독이자 작가, 화가, 코미디언, 제작자이다.
그의 작품 ‘하나비’는 일본 영화 최초로 국내에서 공식 상영 된 작품이기도 하다. 처절하고 쓸쓸한 블루색을 보여주었던 ‘하나비’와 달리 1999년 작품 ‘기쿠지로의 여름’은 초록 잎사귀에 맺힌 이슬처럼 청명하게 푸르른 파란 색감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전 작품부터 함께 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영화의 아름다운 배경 속에 쪽빛 물감을 들인 것처럼 혼연일치가 되어 어우러지며 특히 메인 테마 ‘Summer’는 많은 방송매체의 BGM으로 사용되면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비정한 야쿠자의 세계의 폭력성을 그릴 때에도, 외톨이가 된 경찰의 불운한 최후를 그릴 때에도, 늘 가족을 그리워하는 최후의 순수성을 내재시켜왔다. 그의 이러한 외로움의 고백 같은 영화가 ‘기쿠지로의 여름’이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는 가족여행을 떠나고, 학교의 축구교실마저 휴교하는 여름방학.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의 친구는 노랗게 물들인 머리와 험악한 말투와 달리 혼자가 된 아이를 염려해주고 여비와 보호자를 만들어준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꼬마가 엄마를 찾아 떠나는 낯선 길에 동행하는 퉁명스러운 아저씨와 함께 했던 그 여름의 여행은 어쩌면 그 아저씨-혹은 기타노 다케시-가 기억하는 먼 추억속의 자신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가장 슬프다.’
엄마와 잡은 손을 놓고 눈물을 보일세라 뒤돌아서 뛰어오는 길이라도, 아니면 엄마를 불러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돌아오는 길이더라도, 엄마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부를 때마다 눈물이 같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사는 것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내 어머니만큼은 아니겠지, 내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도 이제 철이 들어간다는 증거인 동시에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수많은 애증과 미묘한 갈등 속에 서로 힘들어 했어도 결국 나의 가족이란 원망이 아니라 이해이며 따지고 드는 원리원칙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어느덧 내 부모의 나이에 와서 서 있는 것이다.
날이 춥다. 시려운 손을 부비며 아랫목에 밥그릇을 넣어 따뜻한 온기로 데워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잡아보고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진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가족, 내 어머니의 모습 같은 영화와 음악과 함께 그 사랑의 기억이 모든 이의 차가운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되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