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바람이고 소인은 풀이니 풀은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다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전설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하고 265년 서진(西晉)이 수립되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44년의 기간 동안 조조(曹操)의 위(魏)나라와 유비(劉備)의 촉(蜀)나라 손견(孫堅)의 오(吳)나라 3국이 천하를 나누어 다스린 시대를 ‘삼국시대(三國時代)’라 한다.
중국 원(元)나라 말기의 장편 역사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이 후한 말기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수많은 영웅들의 전쟁과 군웅할거를 소설화한 것이다.
삼국지는 위지 30권, 촉지 15권, 오지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는 중요한 역사서이다. 그리고 조조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등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들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 - 유비가 세상을 얻다
중국 후한 말인 184년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결사의 수령 장각(張角)이 지도한 농민 반란인 ‘황건의 대란(黃巾 亂)’이 일어나자 이들 군웅들은 토벌대의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조와 손견은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유비도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함께 토벌에 나섰다. 이때 조조와 손견의 나이 30세, 유비의 나이는 24세였다.
200년, 관도의 대전에서 조조는 한때 동맹관계였던 후한의 맹장 원소(袁紹)의 군대를 격파하고, 후한의 어린 황제 헌제(獻帝)를 모셔와 중원을 다스릴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난세를 통일할 포부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던 유비는 군사(軍師) 서서(徐庶)로부터 제갈량(諸葛亮)의 소문을 듣고 그가 살고 있는 와룡강변의 융중을 찾아갔다. 유비는 제갈량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 위해 추운 겨울날 그의 초가집에서 반 리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세 번의 성심(삼고초려, 三顧草廬) 끝에 제갈량은 유비를 따라 신야로 왔다. 이때 제갈량의 나이 27세였다.
제갈량은 유비가 천혜의 요새인 형주와 기름진 평야지대인 익주를 장악하여 터전으로 삼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단 동쪽의 손권(孫權. 후한의 무장 손견의 아들. 오(吳)나라를 건국하고 무열황제(武烈皇帝)가 됨)과 연합하여 북방의 조조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조는 유표(劉表)가 병사한 형주를 손쉽게 차지한 후 도망가는 유비와 백성들을 추격하여 양자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렵사리 손권과 연합에 성공한 유비는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적벽(赤壁)에 이르러 장강 남쪽에 연합군 부대를 주둔시켰다.
적벽대전(赤壁大戰) - 주유를 세상에 내고 다시 공명을 내다
이때 손권의 대도독(大都督)은 ‘주유(周瑜)’였다.
주유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도량이 넓고, 겸양으로 남을 대할 줄 아는 당대의 영웅이었다.
노숙(魯肅)이 주유를 찾아가 조조의 북방 침략과 제갈량의 계획에 찬성하자는 의견을 이야기하자 주유는 “나도 동감이오.”라고 말했다.
뒤이어 찾아온 주화파(主和派)의 우두머리인 장소가 조조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주유는 또다시 “나도 동감이오.”라고 말했다.
끝까지 항전을 불사하겠다는 정보와 항개의 말에도 주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의 팔십 만 대군이 밀려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국론이 양분된다면 이는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주유는 자신이 섣불리 말을 꺼내어 어느 한쪽을 지지할 경우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까 우려했다. 이것이 주유가 최후에 의견을 나누어야 할 대상자인 주군 손권과의 독대 이전에 누구에게도 함부로 심중을 내보이지 않은 이유였다.
손권을 설득하여 군사 3만을 주면 조조를 격파하겠다고 장담한 주유는 화공(火攻)에 필요한 구체적인 사항들을 황개(黃蓋)와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리고 황개는 투항하러 가겠다는 거짓편지를 조조에게 보냈다.
동짓날 밤 동남풍이 불기 시작하자, 황개는 기름을 바른 마른 갈대와 볏짚을 스무 척의 배에 가득 싣고 그 위에 다시 기름천을 덮었다. 조조의 장병들은 손권의 대장이 투항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배 위에 나와 구경을 했다.
조조의 수군영에서 2리쯤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황개의 배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다. 화염에 휩싸인 배들은 세차게 부는 동남풍을 타고 조조의 수군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조조의 수군영의 주변은 배들을 쇠못과 쇠사슬, 판자들로 연결해 놓은 연환선(連環船)으로 둘러싸여있어서 조조군 진영은 달아날 틈도 없이 삽시간에 모두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꿈꾼 초인(超人) - 제갈량
연합군이 적벽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공신은 주유가 당시의 정세를 정확히 읽고 놀라운 기지로 대응한 데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유를 세상에 내시고, 어찌 다시 제갈량을 내셨느냐!”라고 말할 정도로 천고에 빛나는 불후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제갈량이었다.
주유가 제갈량의 신묘한 재주를 시험해 본 유명한 일화가 바로 ‘초선차전(草船借箭)’이다. 주유가 제갈량에게 열흘 안에 10만 개의 화살을 만들어 내기를 요구하는데, 제갈량은 흔쾌히 승낙하며 오히려 사흘 안에 만들어 주겠노라고 장담을 했다. 이에 주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제갈량의 목을 베겠다고 했다.
약속한 사흘째 되던 날 새벽에 제갈량은 풀단을 가득 실은 배 스무 척을 이끌고 안개가 자욱한 장강을 따라 조조의 수군영 가까이 접근해서 군졸들에게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라 명한다. 안개 속에서 적군의 함성소리가 들리자 놀란 조조의 군대는 궁수를 동원하여 화살을 퍼부었다. 이 때 제갈량은 뱃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라고 명하니, 배 양쪽에는 비 오듯 화살이 날아와 모두 풀단에 꽂혔다. 풀단에 꽂혀 있는 화살의 개수를 세니 10만 개가 넘었다.
짙은 안개가 낀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노숙의 물음에 제갈량은 “장수가 되어 천문을 알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고, 기문(奇門)을 알지 못하고, 음양을 알지 못하고, 진도(陣圖)를 알지 못하고, 군사적 정황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용렬한 사람이오. 나는 사흘 전에 이미 오늘 안개가 많이 낄 것을 예상했소.”라 하였다.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국궁진췌 사이후이
이처럼 세간에 전해지는 제갈량의 초인적인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가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 사실이다.
214년(건안 16년) 유비는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인 천하통일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제갈량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後主) 유선을 보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군사를 끌고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나는데, 떠나는 날 아침 황제 앞에 나아가 바친 글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 ‘출사표(出師表)’이다.
출사표는 진(晉)나라 이밀(李密)이 무제에게 올린 ‘진정표(陳情表)’와 당(唐)나라 사상가 한유가 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과 함께 중국 3대 명문 중 하나로 꼽힌다.
出師表 - 출병(出兵)하면서 올리는 표문(表文)
(전략) 신(臣)은 본래 베옷을 입고 남양(南陽)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난세에 그저 목숨이나 보존하면서 제후들에게 명성이나 영달을 구하지 않았는데, 선제께서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직접 몸을 굽히시어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신을 찾아주시고 신에게 당시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온힘을 다하겠다고 하였는데, 뒤에 기울고 엎어지는 때를 만나 패전의 즈음에 임무를 맡고 위태롭고 어려운 가운데 명을 받든 것이 이후로 21년이 되었습니다.(중략)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토벌하고 왕실을 회복하는 일을 맡기시어 공을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다스려 선제의 영전(靈前)에 고하시고,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허물을 책하시어 그 태만함을 밝히십시오. 폐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계획하시어 올바른 길을 물으시고 바른 말을 살펴 받아들여 선제(先帝)의 유언을 잘 따르신다면 신(臣)은 은혜를 입은 감격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멀리 떠나게 되어 표문(表文)을 대하고 눈물이 흘러내려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때의 북벌전에서 제갈량과 지략을 다툰 위나라의 명장이 사마의(司馬懿)였다. 그는 끝까지 제갈량의 공격에 응수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켜 지구전으로 나아감으로써 물자가 부족한 촉의 자멸을 이끌었다. 263년 유비의 촉한은 멸망했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은 진(晉)나라를 세우고 280년에는 오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전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강호영웅들의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백성들의 믿음 없이는 정치(政治)가 바로 서지 못한다-‘民無信不立(민무신불립)’
옛 중국인들은 궁, 상, 각, 치, 우 다섯 음을 음양오행이 일컫는 오행의 기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궁은 토(土), 상은 금(金), 각은 목(木), 치는 화(火), 우는 수(水)의 기운에 대응한다고 여겼다. 또한 오음을 정치적 의미와 관련지어 궁은 군(君), 상은 신(臣), 각은 민(民), 치는 사(事), 우는 물(物)에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궁상각치우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임금, 신하, 백성, 일, 물건 등이 모두 조화를 이루어 정치가 조화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군자는 바람이고 소인은 풀이니 풀은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다. 잘 다스려지는 세상의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롭다. 어지러운 세상의 음악은 원망스럽고 노여우니 그 정치가 일그러져 있다. 망한 나라의 음악은 슬프고 비통하니 그 백성이 곤고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백성들의 믿음 없이는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한다.”라고 했다.
오나라의 주유와 촉나라의 제갈량과 노나라의 공자는 서로 나라와 시대는 달랐지만, 바라는 것은 한가지였을 것이다. 군주가 바로 서고 백성이 바로 서는 나라, 법이 바로 서고 도덕이 바로 서서 모두가 화평한 나라가 그것이다. 그들이 강호에서 지혜를 겨루고 싸웠던 것은 모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가. 이것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난 세월 격랑의 시간을 힘겹게 헤쳐 나온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염원이기도하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가 태풍 속에 위태롭다고 해도 이 사납기만 한 바람도 언젠가는 잔잔한 미풍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 뒤에 올 사람들의 미래가 될 바람은 더 없이 조화로운 음악으로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기에,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바람을 다루었던 의기(義氣)로운 인재들의 출사표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시기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삼국지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