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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athan Feel Nov 12. 2017

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자가 '아메리칸 커피'를 시킨 이유

[밤9시의커피] <천일의 약속>을 통해 커피 알레고리를 멋대로 해석하다

사실, 거의 모든 커다란 위기 때 우리의 심장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따스한 한 잔의 커피인 것 같다. _알렉산더 왕(?)


밤 9시, 늦은 시간이다. 

커피를 마시기엔. 물론, 커피 마시면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얘기다.

누군가에겐 밤 9시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이성과 감성이 서로를 견제한다. 세계가 새롭게 열리기도 하는 창조의 시간. 밤9시의커피를 찾는 많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시간일 것이다. 나는 그 구체적인 한 명 한 명을 위해 단 하나의 커피를 내린다. 그들이 창조의 비행기를 몰다가 잠시 숨을 고를 때, 창조의 윤활유를 공급하는 공중급유기 같은 커피. 

  

그런데 밤 11시에 도달한 시간이었다. 

"에스프레소 도피오 주세요." 


이 시간, 에스프레소, 흔하지 않은 경우다. 그것도 도피오라니. 50대로 보이는 여인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말투는 단호했고, 어떤 옵션도 필요 없다는 투였다. 설탕 혹은 시럽, 크림이나 (스팀) 우유도, 꼭 사치라는 뉘앙스. 이럴 땐 말없이 추출하는 수밖에. 그저 황금빛 에쏘 도피오를 놓으면 그뿐이다.

 

알레고리. 

표면에 드러난 것으로 내면의 숨은 뜻을 전달하거나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건 곧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다층적이고 모호한,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헛다리를 짚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좋아했던, 김수현 작가가 쓴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는 커피가 알레고리가 되는 지점이 있다. 아마 대부분 시청자들은 그런 생각, 않을 것이다. 하긴 내가 괜한 꼼수(?)다.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혼자만의 알레고리. 작가 의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드라마 속 그들이 내놓은 커피를 통해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곤 한다.

 

"자살 폭탄을 짊어진 놈"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지형(김래원)이 결국 폭탄을 터트렸다. 충분히 터질 줄, 누구나 알았던 그것. 향기(정유미)를 향한 파혼 선언. 정혼자가 있음에도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는, 그러나 기억을 잃어가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여자, 서연(수애) 때문이다.


뭐, 수애 정도라면 나라도 그러겠다, 고 말하지만, 알다시피 폭탄의 사정거리는 주변부 싹쓸이! 직격탄을 맞은 지형의 엄마 수정(김해숙)은 용케 서연 연락처를 알아내어 득달같이 서연을 찾는다. 

수정과 서연이 처음 마주 대하는 순간. 서빙이 이뤄지는 고급스러운 커피하우스다. 

수정이 말한다. "어, 나는 에스프레소 더블, 서연 씨는?"


어떤 차를 마실지 묻는 서연의 질문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단호한 말투다. 당연히 그것이어야 한다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알렉산더 왕의 것인지 의심(BC(기원전)에 커피를 마셨을까?)이 가는, 커피에 대한 말이 떠올랐다. 커다란 위기, 심장에 필요한 것, 한 잔의 따스한 커피. 커피 메뉴로 위기의 정도를 가늠한다면, 에스프레소, 그것도 도피오는 최강이다.

 

그것은, 곧 수정의 마음이다. 아들 지형의 폭탄 같은 파혼 선언으로 벌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고 싶은. 빠르게(express) 내린 에스프레소처럼 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특별히 너(손님)를 위해(especially for you) 만든 에스프레소(Espres)를 마시는 날 봐서, 내 애원을 들어달라는.


에스프레소 더블이 내겐 그런 알레고리였다. 폭탄 맞은 여자의 어떤 안간힘 같은 것.


그렇다면, 알츠하이머와 싸우는 여자의 주문은 무엇일까.

 

에스프레소 더블(도피오)을 시킨 수정이 뭘 마실지 묻자, 서연은 살짝 벙 찐 표정을 짓는다. 엇, 이게 뭐지?, 하는 얼굴. 처음 보는, 심각하거나 불편할 수 있는 관계의 사람이 에스프레소 도피오를 시킨다면, 충분히 흠칫 놀랄 수도 있겠다. 에스프레소가 주는 알레고리 때문이다.

 

서연은 곧 이를 수습하면서 '아메리칸 커피'를 주문한다. 에스프레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커피. 그것이 두 사람이 현재 처한 상황이나 속해 있는 세계의 다름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아메리칸은 진한 커피를 싫어하는, 아주 연하게 추출한 커피다. 드립이나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내려서 거기에 다시 물을 섞은. 즉 이 커피를 시킨 서연의 알레고리는 이렇다. 나는 당신이 왜 온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유럽과 미국의 차이이기도 하다.

유럽의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지에선 에스프레소(도피오)를 즐기나, 미국은 매우 엷은 커피를 선호한다. 그래서 아메리칸이다. 레귤러보다 더 연하다.

 

서연은 지형과 나눈 사랑의 단초가 된 커피를 마실 때도 커피는 해롭고 오래 살아야 한다며 설탕을 넣지 않는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아메리칸 역시 설탕이나 크림을 넣지 않는다. 그녀의 커피 취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맑고 자극적이지 않다. 

두 사람의 관계와 성향이 커피를 통해 나타난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과 이야기를 커피를 통해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게 된 서연이 지형을 만나 오피스텔로 가는 그때. 그 위태롭고 애처로운 순간에도 서연은 익숙하게 커피를 갈고 추출한다. 두 사람의 익숙한 리추얼. 그래, 맞다. 위기의 순간에 그들의 심장에 필요한 것은 따스한 커피 한 잔. 


날마다 바보가 되어가는 치매 환자인 여자와 그녀를 사랑해서 다른 여자와 파혼한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커피 한 잔이다. 그것은 어쩌면 안간힘이다. 왜 저들이 저런 상황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커피를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11시에 가까운 시간, 에스프레소 도피오를 마셔야 하는 여인의 심연도 그럴 것이다. 

내가 구체적으로 알진 못하나, 그녀의 심장이 근본적으로 그 커피를 필요로 한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기에 황금빛 'especially for you'를 그녀의 심장 앞에 대령한다. 


커피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한다. 오늘, 그것으로 충분하다. 


참, 서연의 사촌오빠 재민(이상우)이 초반에 서연에게 아이스커피와 따뜻한 커피를 들고 가서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그걸 놓고 자상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한다. 하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연을 아끼고 보살펴주는 척하는데, 그녀의 취향조차 몰라서 고르라고 하다니. 예술가적 예민함과 섬세함을 지닌 서연이라면, 아마 아이스든 따뜻한 음료든 자기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모르고 냉온 모두를 들고 간 것은 무심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다. 나는 거기에 커피 한 잔을 건다. 당신도 배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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