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9시의커피]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에 생각하는 사회적 연대
“적어도 커피 한 잔쯤은 해야죠?
나는 설탕을 조금만 넣고 크림은 전혀 넣지 않지만, 이게 진짜 커피죠.”
_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문득 멈춰 서는 계절이다. <밤9시의커피>는 11월이 오면, 이 책을 꺼내 놓는다. 《늦어도 11월에는》. 독일 작가 한스 에리히 노삭이 지은 소설이다. 줄거리를 시시콜콜 읊조려 봐야 이 소설을 설명할 수 없다. 읽어야 알 수 있다. 11월 계절풍이 불어오면 왜 이 소설이 묻어나는지, 그리고 왜 커피가 함께해야 하는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커피를 마시다가 쏟을 뻔했다. 소설 속 작가 베르톨트는 재벌가 며느리 마리안네와 처음 만나 불쑥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사도 없이, 자기소개도 없이, 눈 맞춤도 없이. 이 말을 둘러싼 자기장이 궁금했다. 어떤 운명이 자기장을 타고 떠돌았던 것일까. 마리안네가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를 따르기로 한 결정을 이끈 자기장 말이다. 때론 궁금했다. 그때 만약 마리안네가 커피를 마셨다면 어땠을까. ‘이성의 음료’라고 불리는 커피는 자기장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아메리카 선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다. 감탄을 부르는 작명이다. 《늦어도 11월에는》에도 그런 정서가 있다. 달력 한 장을 남겨둔 11월은 여러 감정을 부른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데다 다른 달보다 휴일이나 기념일이 적은 까닭도 있지 않을까. 이럴 때, 단골들과 두런두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어제는 마을에서 ‘솔’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동효 씨가 <밤9시의커피>를 찾았다. 피곤에 잔뜩 절은 표정이었다. 배달 노동을 마치고 온 길이라고 했다. 그는 본디 다양한 미술 작업을 하는 예술가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예술 활동에 타격을 입고 배달 노동에 뛰어들었다. 그전에도 아르바이트 노동을 겸했지만 배달 노동은 사실상 막혀버린 예술 작업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배달 노동 열 달째, 생계야 분명 나아졌다지만, 본업은 지친 몸 때문에 진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힘들어. 제가 좋아하는 커피로 주세요. 이 고단함과 피곤을 잊는 데는 커피만 한 게 없어요”
솔이 즐기는 커피는 에스프레소다. 잔 아래 설탕 두 스푼 깔고 뽑은 에스프레소. 그는 이렇게 뽑은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석 잔을 마신다. 단골들은 이를 ‘솔취’(솔의 취향)라고 부른다. 메뉴판에는 없지만, 단골들만 아는 메뉴다. 첫 잔을 홀짝 마신 솔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듯 크게 기지개를 켰다. “역시 에쏘! 이제야 살겠네. 정신에 파파팍 불이 켜지는 것 같아요. 오늘 주문이 너무 많았거든요. 저 같은 사람은 커피 없이 어떻게 견디나 싶어요.”
맞아, 맞아. 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진즉에 커피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료였다. 즉, 노동을 위한 윤활유였다. 따지자면, 상품으로서 커피를 발굴한 장본인은 네덜란드인이었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귀족 중심의 커피는 19세기 식민 시대와 산업혁명에 맞물려 다른 양상으로 돌아섰다. 커피에 본격적으로 노예와 노동자의 땀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산업화는 노동 시간의 확대를 요구했다.
“커피가, 지금 솔에게 퍼지듯 말이죠, 당시 노동자의 몸과 정신에 이식된 거예요. 말하자면, 노동의 혈맥을 타고 흘렀다 이거죠. 커피는 공장 필수품이 됐어요. 자본가들은 공장 노동자 복지라는 명목으로 커피를 제공했어요. 실은 복지가 아닌 더 부려 먹기 위한 모르핀이었죠”
커피는 어쩔 수 없이 노동자의 피를 먹고 자랐다. 커피나무가 자라지 않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커피 경작지로 활용하고 원주민을 소작 노예로 삼아 수탈했다. 18세기 깨어 있는 시대의 동반자였던 커피는 시민을 만들고 이성을 시대정신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19세기 산업 자본의 성장으로 커피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인민의 노동에 커피는 필수 불가결한 에너지원이 됐다. 자본주의 흐름에 맞춰 금융투기의 대상이 됐다. 커피는 1년 내내 필요한 대량 상품이라는 점에서 상품성이 뛰어났다. 주요 소비처와 생산지가 달랐고, 좋은 커피를 마시겠다는 욕망이 점차 커지면서 산지를 둘러싼 갈등이 생겨났다.
솔이 솔깃했나 보다. 두 번째 잔을 건네주자, 눈이 커졌다. “아, 커피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가 노동자들의 음료로 변했다고요? 와~ 드라마틱하네요. 자본이 끼어들기 시작했으니 신분이라는 깡패도 밀렸겠네요. 산업화 이후 탄소 배출량이 커피 소비량과도 비례하는 것 아니에요? 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 되겠다. 기후변화는 탄소뿐 아니라 커피의 증가와도 궤도를 같이할 수도 있다. 18세기가 눈을 뜰 무렵, 서부 유럽에서는 문학과 풍습이 커피 수요를 늘렸고, 곧 생산량을 뛰어넘을 정도가 됐다. 대중화의 기틀이 닦인 셈이었다. 17세기만 해도 커피는 기호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늘자, 자본과 국가가 관심을 가졌고 커피는 상품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러면서 커피는 일하는 사람들의 음료가 됐다. 자본가들은 그것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이성의 음료는 노동의 음료로 변신했다.
“커피가 왜 노동의 음료가 됐는지 알아요?” 두 번째 잔을 들이켠 솔은 어깨를 쫙 펴면서 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었다. “각성 작용을 하니까요. 커피 덕분에 지금 제가 이렇게 살아난 것처럼요.”
“맞아요. 카페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죠. 우리 몸에는 수면을 이끄는 아데노신이라는 물질이 있어요. 그런데 카페인이 아데노신이 수용체와 결합하는 걸 방해하거든요. 이 때문에 피곤을 덜 느끼게 돼요. 여기서 중요한 건 피곤을 가시게 하는 게 아니라 덜 느끼게 만든다는 거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커피를 주면서 설탕도 곁들여 줬어요. 당연히 이유가 있겠죠? 지금도 많은 블루칼라 노동자가 믹스커피를 마시는 이유예요. 설탕과 크리마는 당으로 분해되는데, 당은 몸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연료로 작동해요. 커피가 노동 현장에 늘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죠.”
이렇게 보면 커피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자본(가)의 계략이었던 측면이 있다. 끊임없이 일하라는 자본의 요구를 품은 커피가 노동의 혈맥을 따라 흐르면서 생산을 책임졌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 커피가 마냥 노동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됐던 것은 아니었다. 몸에 일시적으로 환각 효과를 부른 탓이다. 커피를 너무 자주 혹은 많이 마시면 카페인에 신경이 교란되어 적절한 휴식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더 많은 카페인을 부르기도 해서 신체는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박동수와 호흡이 빨라지고 근육이 경직되며 혈압이 올라가는 부작용을 불렀다. 결국 문제는 적당함이었다. 나에게 맞는 커피양과 노동에 맞는 커피양이 중요하다. 솔에게 물었다. “에쏘 석 잔이 딱 좋아요?” 솔은 얼른 세 번째 잔을 달라고 재촉하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예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우리 후손들의 경제적 가능성》(1930)에서 100년 뒤인 2030년을 그렸다. 케인스는 이때 인류가 생계형 노동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생산성이 높고 자본을 축적한 상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그가 예상한 2030년의 인류는 이러했다. 첫째, 주당 평균 15시간만 일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둘째, 먹고사는 일보다 여가를 어떻게 쓸 것인지가 더 중요해지며 문학과 예술이 경제보다 앞선다. 셋째, 인류는 마침내 지혜로움과 유쾌함과 풍족함을 달성한다.
세 번째 잔을 솔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자, 세 번째니까 냉철하게 머리 돌려봐요. 이제 10여 년 남았는데 케인스 예언이 맞아떨어질까요?” 솔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그건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코로나 일단 물러가고, 생산성은 AI가 달성하도록 만들고, 우리는 기본소득 받으면서 문화예술이 더 중요한 삶을 사는 거죠.”
문득 2030년의 커피도 궁금해졌다. 몽테스키외는 커피가 멍청한 사람이 때로는 현명한 행동을 하도록 해주는 물질이라고 말했다. 몽테스키외의 공언(?)이 맞다면, 커피 소비량이 꾸준히 늘어났으니 인류는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해야 하거나 더 똑똑해져야 한다. 그러나 세계 어디서나 몸으로도 체감할 수 있는 심각한 기후위기에도 인류는 현명함과 먼 결정을 내린다. 친환경 마케팅·굿즈라는 명목으로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소비를 부추기는 커피 대기업은 어떻고.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 때문에 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커피 노동자는 울고 싶다. 커피 생산을 존중하지 않는 무수한 중개상인 탓에 커피를 경작하는 노동자도 즐겁지 않다. 대체 커피는 누구를 현명하게 하는 것인가. <밤9시의커피>가 제공하는 커피는 쓸모가 있는 것인가.
19세기에 문을 연 산업화 시대는 인간에게 하루 종일 노동을 요구했다. 자본가는 커피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원임을 알아차렸다. 앞선 세기와 달리 노동자가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까닭이다. 커피는 공장과 노동의 필수가 되었다. 앞선 세기, 철학과 경제적 부자유가 우연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데 일조했던 커피는 시민혁명의 동력원이었다. 한 세기를 넘나들며 커피가 보여준 변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2030년의 커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잉태할 수 있지 않을까. 새 커피도 새 부대에 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솔이 마지막 잔을 비우자, 나는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Hope for the World.” 노벨경제학상(1998년)을 받은 바 있는 아마르티아 센이 자신의 회고록 맨 마지막에 적은 글귀라고 알려줬다. 힘든 노동을 마친 솔에게 <밤9시의커피>와 단골들이 함께 건네는 말이었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알려줬다. 무엇보다 끈끈한 단골들의 연대가 있으니, 솔의 좋은 것을 지켜나가길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의 이 말이 틀리기를 바랐다. “우리는 지키는 것에 형편없고 서둘러 덮는 일에는 신출기몰 하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불행이 무엇인지는 모두 알고 있다. _《늦어도 11월에는》 중에서
이 소설은 통속의 예술이었다. 솔이 이 예술적 연애소설을 읽고 자신의 느낌을 그림으로 작업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린다면 11월마다 <밤9시의커피>에 그림을 걸고 싶다고 덧붙이며.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많은 11월이 남았으리라. 그러면서 스위트 노벰버를 꿈꾼다. 동명의 영화(2001년)가 있었다. 만듦새는 엉성했으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 키아누 리브스와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했던 11월 한 달동안 펼쳐진 애잔하고 애틋한 사랑. 한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생으로 스며 들어가 또 하나의 빛나는 생이 되는 이야기. 2030년의 커피를 향해 ‘스위트 노벰버’를 만들어보기로 한다. 노랗고 빨갛게 익은 가을의 색깔처럼 사회적 연대의 쓰고 달콤함을 담은 커피를 만들고 싶어졌다.
단풍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제 몸처럼 뜨거운 노을을 가리키고 있네
도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묻는 나에게
단풍들은 대답하네
이런 것이 삶이라고
그냥 이렇게 화르르 사는 일이 삶이라고
_조태일 [단풍]
커피문예지 <카페인-겨울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