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nathan Feel Apr 05. 2022

지금보다 잘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밤9시의커피]  봄날, 봄비 그리고 다윈의 커피

커피 마실 때가 참 좋다.

커피는 생각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료 이상이다.

_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밤9시의커피>에 봄이 피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눈이 녹아 봄이 왔는지 궁금합니다. 힘겹고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서도 봄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때맞춰 어제는 봄비가 촉촉하게 흩날렸습니다. 감각을 열어 봄비 내음을 맡아본 사람은 알 겁니다(당연하게도, 귀도 함께 열어야지요). 코에 송알송알 스며든 봄비 내음은 알알이 혈관을 타고 내려가 심장 부근에서 터지고야 맙니다. 스멀스멀 혈관을 타고 돌아 도는 그 내음이 참으로 알싸합니다. 봄비가 내 몸의 일부를 구성하고 마는 순간, 나는 온전히 봄이 되고야 맙니다. 내가 봄이다,라고 외치고 싶어 집니다.


긴 겨울이 끝나고 안으로 지쳐 있던 나

봄 햇살 속으로 깊이 깊이 걸어간다 _ 이해인 詩 ‘봄 햇살 속으로’ 중에서     


기후위기 등으로 짧아진 봄이 마냥 아쉽지만, 짧은 봄이라도 만끽하고자 하는 바람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살짝 차가운 기운과 낮 동안 흐드러지게 다가오는 봄 온기의 공생이 빚어내는 촉감이 나를 간지럽힙니다. 봄날의 곰이 다가와 몸을 비비는 것 같습니다. 봄비가 지나간 자리, 커피 향은 더욱 진하게 느껴집니다. 커피가 데워준 온기도 세상 가득 잔향을 남깁니다. 이런 봄날, 밤9시의커피는 특별한 메뉴를 준비합니다.


물론, ‘와, 봄이 왔으니 전쟁을 끝내자’와 같은 동화는 없습니다. 봄이라고, 차별과 혐오에 대한 공격이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봄의 건조함에 기댄 불길도 쉬이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파란 봄 하늘에 소망 한 조각 실어볼 수는 있잖아요. 소망 구름을 하늘에 띄워봅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오듯, 포탄과 혐오가 녹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詩의 아름다움을 읊고, 차별 없이 다양성이 활개 치고, 몸과 정신이 안전함에 기대며, 놀이가 즐거운 평화가 봄과 함께 깃들면 좋겠습니다.


다윈은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커피를 볶고 내리면서, 다윈을 떠올렸습니다. 남을 할퀴고 짓밟는 경쟁과 혐오에 중독된 사람들에 신물이 나서였을까요. 그들은 다윈이 주창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을 멋대로 끌어들여 악행을 정당화합니다. 《종의 기원》에 대한 치명적 오해랄까요. 하긴, 다윈의 진화론은 자주 악용됐습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이용당했고, 우생학에 의해서도 오용됐습니다. 진화론은 과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꽤 많은 왜곡과 범죄로 이어졌습니다.

 

기실, 다윈이 말한 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는 차별 등을 부추기는 기제가 없었습니다. 제국주의에 경도된 과학자, 정치인 등이 우승열패,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적자생존을 곡해했습니다. 다윈이 말한 ‘적자’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닙니다. 환경 적응도가 높은 생물입니다. 현대 생물학에서 적자생존은 특정 환경에 있는 생물의 번식 성공률을 말하는데, 잘 쓰이지 않는 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진짜 적자생존은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난 민족·종족은 없으며 환경 변화가 특정 개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사자는 밀림의 왕일 수 있지만, 환경 변화로 내일은 다른 동물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윈은 적자생존보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훨씬 많이 사용했습니다. 적자생존이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고 오해받기 쉬웠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논쟁하는 등 인종차별을 반대했다는 다윈 입장을 보면 그랬을 것 같습니다. 특히 당시 일상이었던 여성 차별에 대해서도 다윈은 “인류 미래는 여성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다윈은 요즘 말로 엘라이(사회 속 차별을 없애기 위해 고민하고 연대하는 사람)였습니다.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또 이렇게 언급했다죠. “뿌리 깊은 육체적 본능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기준이 인간 진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다윈에게 인류의 진화나 진보가 완력이나 권력에 달려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종족이나 집단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는 마음 혹은 지혜의 크기 등에 있다고 보았던 듯싶습니다. 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 부족/집단 전체의 유지를 이끈다는 것이 다윈의 생각이었습니다.     


다윈이 식민주의나 문화 학살, 노예제, 성차별주의 등을 옹호했다는 오래된 오해가 있습니다. 진화론을 악용한 이들이 역사·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켜서 그렇습니다. 야만을 반대했던 다윈은 약자를 향한 손길을 비호하고 실천했습니다. 이렇게 다윈에 대해 왈가왈부하다니, 웬일인가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4월이어서 그렇습니다.


사유를 부르는 다윈의 커피     


오늘, 다윈을 떠올리며 커피를 볶고 내렸습니다.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자란 커피입니다. 

다윈이 진화론 아이디어를 얻고, 《종의 기원》을 낳게 한 곳이죠. 다윈의 131주기(1882.4.19) 즈음을 맞아 특별히 골라봤습니다.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커피가 재배되는 곳은 산 크리스토발(San Cristobal) 섬입니다. 고도 800m 이상에서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커피가 안개의 도움을 받아 잘 익는 장소입니다. 특히 중앙에 솟아 있는 화산 입구에서는 자연 용수가 흘러나와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호수는 섬 전체에 물을 제공하는 역할도 합니다.      


이곳에서 커피는 1875년 돈 마누엘 조보스라는 사람이 버번종 종자를 들여와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수확은 11월에서 1월 사이에 하는데, 어디서든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커피는 아닙니다. 커피가 ‘생각의 도구’였다고 본다면, 진화론을 가능하게 만든 커피인 셈입니다. 밤9시의커피를 찾는 이들이 다윈의 사유를 깨웠을지도 모르는 커피를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커피로 맺어진 연대라고 해야 할까요. 이 커피를 마시면서 엘라이로서 사유하고 행동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생물학자 다윈처럼 역사가인 나도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세계 전체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늘 역사 변화의 실험실이었다. 그곳에선 늘 짐작과는 다른 일이 벌어져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대부분의 통념을 밑동부터 흔들었다.” (《미완의 시대》(에릭 홉스봄) 중에서)

인류사를 보면 늘 열등하다고 여겨지고 차별받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여성, 흑인, 노예, 성소수자, 동물 등이 그렇습니다. 힘을 쥔 지배 세력은 이를 정당화하는 이념을 만들어 유포했습니다. 숱한 피와 고통이 따른 가운데 인류는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점차 철폐하였습니다. 도덕적 사고를 확장하게 만든 숱한 사람의 투쟁과 피땀이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차별의 완전한 철폐나 평등은 아직 완전하지 못합니다. 자신과 다른 존재라면 차별하고 억압하려 드는 인간의 사회적 성향도 한몫하겠지요. 

     

커피 한 모금 들이킵니다. 다윈과 홉스봄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요? 역사는 마냥 그렇진 않았습니다. 프랑스 방송 기자이자 동물권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에므리크 카롱이 말했듯, 인류를 진보로 이끈 모든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처음에는 조롱받고 불신을 샀습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는 걸림돌을 하나둘 치우고 전환을 이뤄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불평등과 차별을 반드시 없앨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봄비 따라 흐르는 더 좋은 세상     


묘하게도 다윈이 지난 자리에는 ‘장애인의 날’(매년 4월 20일)이 따라옵니다. 얼마 전,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했던 장면이 뚜렷이 떠오릅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주도한 정당한 시위였습니다. 21일 동안 했던 이 시위는 장애인·영유아·임산부 등 교통약자 이동권 보장 및 예산 확대, 탈시설 예산 증액 등을 요구했습니다. 일부 언론은 이유보다 출근길 시민의 불편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일부 시민은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왜 시위하는지 들여다보지 않고 시위 방식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도 헸습니다.     


장애인들이 직접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백했습니다.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이동할 권리를 빼앗겼으니까요. 사회학자 에이프릴 카터는 직접행동에 대해 “지배 엘리트 계층에 대해 자기 이익을 반영하지 못하고 별다른 지렛대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채택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세계 10위권 경제선진국임에도 장애인이 마음 놓고 밖으로 나와 이동할 수 없는 현실이 명확히 보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오죽하면 출근길에 비난을 감수하고 시위에 나섰을까요. 우리 사회의 초라한 자화상을 엿봤습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조용했습니다. 유일하게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만 TV토론에서 책임이 정치권에 있고 매우 죄송하다고 언급했습니다.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에게 다시 목소리를 돌려주는 게 사회와 정치의 의무임을 다시 상기합니다.     


봄비 온 뒤 하늘은 맑았고, 영화 <호우시절>도 떠올랐습니다. 바짝 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신 좋은 비였습니다. 울진·삼천 등의 큰 산불이 안긴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면 좋겠습니다. 봄비 이후의 커피를 내리면서 그런 마음을 담았습니다. 당신을 비롯하여 여전히 세상에서 소외받는 아픔과 슬픔에게 커피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당신이라는 꽃이 활짝 피는 날, 세상에도 완연하게 진짜 봄이 올 겁니다. 그때 밤9시의커피에도 봄이 뿌려주는 빛깔을 닮은 메뉴를 준비할게요.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다윈이 남긴 진화론이 건네는 메시지를 곱씹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커피문예지 <카페인> 기고문

매거진의 이전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피, 스위트 노벰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