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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athan Feel Aug 03. 2021

제가 살고 싶은 커피향 가득한 집은...

[밤9시의커피] 집이 詩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이일훈 건축가를 추모하며

(※ 2021년 7월 2일 향년 67세로 별세하신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께 올리는 추모글 형식으로 꾸몄습니다.)

“모든 생물이 생존을 위해 내딛는 가장 중요한 첫발은 살 곳을 정하는 것이다. 적절한 장소를 찾는다면 그 밖의 다른 것은 훨씬 쉬워질 것이다.”  _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맥락 없이 이런 물음을 접했다면,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던질 법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이일훈 선생님을 뵙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물음은 건축과 삶을 연결하는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짓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먼저 묻는 게 건축이라고 여긴다는 말씀에 저는 집과 건축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삶을 배제한 ‘집(재)테크’, ‘조물주 위에 건물주’ 등과 같은 말이 창궐하는 시대, 돈으로 매긴 가치만 집과 건물에 딱지처럼 붙은 시대, 선생님 말씀 덕분에 시류에 쉬이 휘둘리지 않는 마음 근육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느닷없이 떠나보낸 7월입니다. 이즈음, 저는 밴드 유라이어 힙(Uriah Heep)의 ‘줄라이 모닝’(July Morning)을 듣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율리우스력을 만든 줄리어스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인이 태어난 달에 ‘줄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지요. 시저가 율리우스력을 만들기 전의 고대 로마 달력상 3월이 1년의 첫 달, 7월은 다섯 번째 달(퀸틸리스)이었으나, 그는 율리우스력을 만들면서 퀸틸리스를 줄라이로 변경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에서도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이런 7월을 아메리카 선주민은 부족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름은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크리크 族)이지만, 선생님의 별세로 ‘지상이 슬픔을 저장하는 달’이자 ‘하늘이 이일훈을 저장하는 달’이 됐습니다.     


살기의 방식에서 시작하는 건축     


오래전 일이네요. 집은 ‘사는(living) 곳이지, 사는(buying)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한때 이를 좁은 울타리에 가둔 탓에 집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동안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건축주(송승훈)와 함께한 ‘생각 나눔’을 엮은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을 읽고 시야를 확 텄습니다. 어쭙잖은 이전 다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죠.     

책을 만나고, 저는 ‘낡은 책과 다듬지 않은 돌로 지은 집’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두 분의 생각 나눔에 정신줄을 놓았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읽기 전과 후가 달라졌으니 말입니다. 집을 단순하게 ‘소유’ 여부에서 바라봤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났습니다. ‘집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사유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저 이 한 몸 뉠 수 있는 지상의 공간이라면 내 집이지, 라는 생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풀 수 있는 공간이 집이라는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책은 집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담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책을 든 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건축의 지형과 삶의 지형은 결국 같다는 말씀. 어떻게 사는가를 묻는 것이 건축의 문제이자 삶의 문제라는 속삭임. 집을 다시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을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에 대한 맹목적 유행과 욕망, 저는 그게 꽤 불만스러웠습니다. 광고 등을 통해 주입되는 타인의 탐욕에 스스럼없이 마음뿐 아니라 삶까지 내어주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건축에서 유행은 경계할 점이 많다는 선생님의 말씀, 그래서 끄덕였습니다. 무엇보다 아파트 브랜드나 평수, 가격 등으로 “타인의 편집된 삶과 나의 전체 삶을 비교하는 불행”(김영우,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40대에 시작한 전원생활, 독립서점, 가사 노동, 채식》)이 눈에 선하게 보였습니다.     


두 분의 생각 나눔에 동참하면서 제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봤습니다. 집은 사람이 짓기에 집보다 사람이 먼저이며, 집을 짓기 전에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 덕분이었습니다. 집 짓는 기술이나 재료, 방법, 구조 이전에 ‘살기의 방식’을 먼저 물었습니다. 어떻게 짓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기. 그것이 집 건축뿐 아니라 삶 건축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저는 집은, 공간은, 그곳에서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을 닮아간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지금 대도시의 많은 거주 양식은 반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이 주어진 집(공간)을 닮아갑니다. 즉,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흔해지는 것 같습니다. 공간과 사람이 나누는 교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페를 드나들 때마다, 공간을 통해 사람을 느낍니다. 주인이든 일하는 사람이든 말이죠. <밤9시의커피>는 그런 면에서 제가 충분히 묻어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두 분의 생각 나눔을 통해 제가 사는 공간, 살고 싶은 공간이 어때야 하는가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와 직결된 문제임을 확인했습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간은 허영의 결과물이며, 허구의 공간입니다. 거대 브랜드의 아파트 광고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런 집은 사람을 닮지 못합니다. 사람을 담아내지도 못합니다. 그런 집은, 그저 물화한 하나의 상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싶습니다. 개별의 인간이 지닌 구체적인 삶이 묻어있질 않으니까요.     


책에서도 느꼈지만, 직접 방문했던 잔서완석루는 건축주인 송승훈 선생님(의 결)이 온전히 묻어난 듯싶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일훈 선생님과 나눈 생각 나눔 덕분이겠지요. 외람되지만, 이렇게 저는 이렇게 표현했었습니다. 이일훈은 ‘송승훈이라는 용질’을 녹여 ‘잔서완석루라는 용액’을 만든 용매! 잔서완석루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대했던 제 소감은 그랬습니다. 당시 독자들이 함께 잔서완석루를 방문한 행사에서 커피를 들고 그것을 내렸던 저를 선생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하나 남겼습니다.     


커피향처럼 살고 싶은 공간을 그리며     


선생님을 통해 저는 둥지를 틀고 싶은 집(공간)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잔서완석루를 통해서였습니다. 공간이 사람을 품는다면, 사람은 공간을 하나의 개성으로 빚어낸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자본의 농간에 놀아나 재테크 수단으로 전락한 ‘집’이지만, 진짜 집(의 의미)을 복원하기 위한 두 분의 노력이 잔서완석루로, 책으로 구현됐다고 생각합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자 삶의 그릇이며, 물질과 정신의 종합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늘 품고 있습니다.     

아, 저는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요? 커피를 만드는 저는, 커피향처럼 살고 싶습니다. 제가 둥지를 틀고 싶은 공간은 커피향 같은 곳입니다. 커피향 같은 곳?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우선 커피향은 정형화되지 않습니다. 어떤 콩을 어떻게 볶느냐에 따라, 어떻게 추출하느냐에 따라, 기분 상태나 조건에 따라, 각양각색입니다. 오늘은 이런 향, 내일은 저런 향, 그렇게 다르지만, 그 향기만으로 세상 작은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반듯반듯하고 질서 정연한 공간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반듯하고 질서 정연한 공간이라면, 아우슈비츠가 있겠죠. 획일적이고 정형화된 학살의 공간. 지금 많은 아파트 단지가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으로만 살고자 합니다. 욕망도 뻔하고, 사는 모습도 빤합니다. 타인의 삶을 살고, 남들 눈치에 휘둘립니다. 커피 향 같은 개성이 없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의 비극입니다. 그걸 획책한 토건업자들의 파시스트성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욕심을 좀 부리자면, 커피향 같은 제 공간은, 어디에도 없는 공간입니다. 어디에도 없는 저라는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간이 크거나 넓을 필요도 없습니다. 남들 보기에 버젓할 이유도 없습니다. ‘베스트(best)’가 아닌 ‘온리(only)’니까요. 그것이 저의 커피이길 바라듯, 저의 집도 그러하길 바랍니다. 아울러 커피향이 잘 배려면, 낡은 공간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화려한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커피향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길쭉한 공간을 품은 집이면 좋겠습니다. 잔서완석루의 ‘책의 길(散冊)’과 같은 곳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커피를 볶고 만드는 곳, 즉 가장 빈도 있게 쓰는 공간을 집의 가장 먼 곳에 배치해 저를 바쁘게 만드는 집에 놓인 커피향의 길. 물론, 선생님께서 언급한 루이스 칸의 말마따나, 땅이 더 좋아할 건축, 이전보다 더 좋은 환경이 되는 집이어야 하겠습니다. 향긋한 커피향 덕분에 마을 주민들이 평상에서 두런두런 모여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좀 더 욕심을 부려봅니다. 제가 자연스레 묻어나고, 타인을 배려하고 유머가 있는,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즐거움이 있는 집. 비싸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어디서든 즐길 수 없는 맛의 호사가 풀풀 풍기는 작은 집. 그런 맛의 호사를 위해, 자급자족할 수 있고, 좋아하는 손님을 위해 음식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텃밭만 마련돼 있으면 그야말로 딱입니다. 좋은 음식과 커피가 있는 나의 아주 작은 집.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레나데를 불러줄 수 있는 집. 사랑하는 우리 각자가 좋아하는 영화와 책이 집 곳곳에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턴테이블에선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와 공간을 채우는 집. 당신과 나, 혹은 우리가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꽉 찰 수 있는 집.     


그런 호사를 위해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저는 뭣보다 화석연료 사용을 크게 줄이고 싶습니다. 지속 가능하고 더 적은 자원을 사용하되 유지하기 더 쉽고 환경에 적은 영향을 미치는 ‘적정기술’을 활용하면 어떨까요. 그러려면 몸을 더 많이 놀려야 하겠지만, 저의 몸놀림으로 집안 에너지를 일부 공급하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자전거 발전기 등으로 커피콩도 볶고, 세탁기도 돌릴 수 있는 그런 것도 꿈꿔봅니다.     

이런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집이 재테크가 아닌, 오롯이 구체적인 실존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으로 존재하면서 사람과 교감하면서 닮아가는 집. 집 이름을 미리 정해놨습니다. ‘수운잡방(需雲雜方)’. 조선 중종 때 안동 출신 김유가 지은 전통 요리서 제목입니다.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특별한 요리’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게 제가 만든 커피를 비롯한 요리를 대접하고 싶어서 이렇게 지었습니다. 잔서완석루처럼 건축주의 마음과 결이 온전하게 묻어나는 집, 공간과 교감을 나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있고, 그 사람이 지닌 독특한 느낌이 집에 묻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떻게 살 것인지, 우리가 사는 집은 어땠으면 좋을지 생각을 나눕니다. 그럴 때, 건축가로 저는 늘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삶의 방식을 성찰하지 않은 집 짓기의 욕망’ 대신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에게 진지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는 가르침 덕분이었습니다. 아울러 송승훈 선생님과 맺은 관계처럼, 건축가와 건축주의 관계를 넘어 친구처럼 삶과 마음을 나누는 모습도 재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건축가의 직관에 따른 눈썰미를 믿는 건축주와 끊임없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건축가의 만남과 소통. 감동이었습니다. 책은 물론 잔서완석루에서 만난 두 분이 그러했듯, 저도 선생님과 그런 만남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선생님과 집 짓기를 하지 못해도, 잔서완석루와 같은 수운잡방에 도달하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둥지 튼 공간을 수운잡방으로 꾸미면 되니까요.      


잔서완석루를 방문해서 제가 두 분을 위해 내렸던 첫 커피는 선물 받은 원두여서 다소 어설펐습니다. 언젠가 두 분만을 위한 커피를 직접 볶아서 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책과 그 만남에 늘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책과 잔서완석루는 저에게 한 편의 문학이자 詩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한 상상은 이제 불가능한 미션이 됐습니다. 이일훈 선생님과 커피향 가득한 집을 짓는 일도, 커피를 내려드리는 일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선생님이 세상에 외치셨던, 채나눔의 건축 철학은 커피향 가득한 집을 짓게 된다면 가장 큰 뼈대로 삼겠습니다.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동선 늘려 살기.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삶에 있어 좋은 답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일훈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커피문예지 <카페인> 기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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