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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athan Feel Apr 01. 2021

구름 사이 잠깐 비친 햇살처럼 연대하는 커피,춘광사설

[밤9시의커피]4월에 생각하는버마 민주화 항쟁,변희수 하사, 장국영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면 이내 내리네

바람 따라 이 밤에 몰래 스며들어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     

두보 춘야희우’(春夜喜雨중에서


봄빛이 눈물처럼 번진다. 두보는 봄비를 만나 호우시절을 읊조렸지만, 지금 봄비는 슬픔을 삼킨다. 어쩌면 핏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것도 같다. 봄이 이다지도 ‘잔인한’ 계절임을 TS 엘리엇은 일찍이 간파했다. <황무지>였다. 아주 조금만 따라가 보자. 433행에 이르는 이 詩를 끝까지 따라가기는 힘들 테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이 詩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담함과 정신적 메마름, 황폐한 현실 등을 통탄했다는 해석이 따랐다. 혹은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려는 생명의 안간힘을 묘사했다는 평도 들었다. 정작 TS 엘리엇은 “인생에 대한 개인 불평”이라고 일축했다지만. 연유야 어쨌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드는” 계절에 <황무지>가 떠오른 건, 버마(미얀마는 이전 군사정권이 바꾼 국호라서 버마를 쓰기로 한다) 민주화 항쟁과 故 변희수 하사의 죽음 때문이었다.


버마에서 펼쳐지는 민주주의의 봄은 너무 잔혹했다. 민주주의를 볼모로 잡은 군사정권은 총과 칼을 마구 휘둘렀다. 군부의 무력 행사에 인민은 무력했다. 붙잡히고, 맞고, 쓰러지고, 때로는 죽었다. 많이 죽었다. 민주화를 향한 버마 인민의 저항은 눈물겨웠다. 군부의 잔혹함에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팠다. 쓰라렸다. 고통스러웠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꼭 그렇게 피를 먹어야 가능한 것이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는 인류의 본성에 없던 것이리라. 본성을 누르고 피를 흘려가며 성취해야 할 민주주의는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권과 폭력에 쉬이 무너지지 않고 공동체 가치를 세우고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민주주의여야 한다. 버마 인민의 피와 눈물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침 <밤9시의커피>에 샘플로 들어온 버마 생두가 있었다. 북부지역 만달레이에서 재배한, 버마에서 드문 워시드(washed) 방식으로 가공한 커피였다. 버마는 인접한 베트남, 라오스, 태국보다 생산량은 크게 떨어지고, 아라비카보다 로부스타 비중이 크다고 했다. 커피산업도 발달이 덜 된 상태다. 쿠데타 전에 문민정부가 커피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커피산업은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일부 산지는 양귀비(아편) 재배를 막기 위해 커피 재배를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했다.      


버마 만달레이 커피를 볶았다. 산미를 살리고 싶었다. <밤9시의커피> 단골들에게 ‘CDM’커피라고 소개하고 장미 한 송이와 함께 건넸다. 시민 불복종 커피, CDM(Civil Disobedience Movement)이었다. 페이스북 <몽유와 시민 민주운동회>의 말을 덧붙였다. “희생된 시민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민주화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아침 9시부터 평화 시위를. 장미꽃 한 송이씩 가져오기를.”     

부산 북구 카페 ‘홍지컴퍼니'는 버마 민주화 항쟁 응원 문구를 공유하는 ‘컵홀더 연대’를 실천한다.(출처: 홍지영 씨)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꿈


변희수 하사 소식도 충격이었다. 커피를 내리다가 뉴스를 듣고는 숨이 턱 막혔다.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눈물방울이 커피처럼 똑똑똑 머그잔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어쩌다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사회적 타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었다. “끝까지 싸울 겁니다. 성소수자의 인권과 자유를 쟁취하고, 차별 없는 군을 만들기 위해서 기갑부대의 모토인 ‘기갑선봉’답게 선봉에 나가서 싸울 거예요.”(한겨레, 2020년 3월 21일치)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단지 그 이유만으로, 대한민국 군대는 누구보다 애국심과 충성심이 강했던 그를 내쫓았다. 일주일 전, 김기홍 씨가 먼저 떠난 것을 슬퍼해서였을까. 초·중학교 전직 음악교사이자 녹색당 비례대표 경선에 나섰으며, 트랜스젠더 활동가이자 제주퀴어문화축제 공동조직위원장이었던 ‘상큼한 김 선생’은 교단으로 돌아가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이 사회의 차별과 혐오 앞에 스러졌다.     


두 사람의 인연이 떠올랐다. 2020년 2월 김기홍 씨는 언론에 공개 편지를 썼다. 군에서 쫓겨난 변희수 하사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으나 등록을 취소한 트랜스젠더에게 보내는 응원이었다. “함께 살아갑시다. 살아내지 않고 그냥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친구가 남기고 떠난 말 ‘성소수자랑 장애인 취업 못 하지 않게 정치 잘해줘요’를 지키려면 많은 분이 일상을 지켜야 합니다. 드러낸 그 자체로 두 분은 저의 희망입니다.”      

서로에게 희망이었던 두 사람은 일주일 간격으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개인이 아닌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이자 꿈은 뚜렷했다. 차별 없는 세상. 하지만, 김기홍 씨는 지쳤다고 했다. 삶도, 겪어야 하는 혐오에도, 자신을 향한 미움에도. ‘오랫동안 쌓인 피로’가 그를 짓눌렀다. 희망의 증거였던 변 하사도 연대했던 따뜻한 손 하나가 떨어져 나가자 지쳤을 것이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희망의 죽음이자 타살이다. 그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질곡 속에서 희망은 덧없이 낙하했다. 차별 없는 세상이 이승에선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의 절망이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포용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죄인이었다. <밤9시의커피>는 단골들과 함께 미안하다고 애도했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 섞인 커피는 너무 썼다. 하지만, 그것을 삼켜야 하는 것이 남은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우리는 어떻게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     


춘광사설연대하는 우리를 위한 커피     


“우리 다시 시작하자.” 

보영(장국영)은 늘 그렇게 말했고, 아휘(양조위)는 늘 그렇게 속았다. 절망이 봄빛을 핏빛으로 물들이던 때, <해피투게더>를 다시 만났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다. 사랑을 다룬 영화였지만,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말이 많았다. ‘남자 간’ 사랑을 다뤘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리마스터링 한 영화는 그때의 논란 따위 없이 재개봉했다.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과 아휘의 이야기는 더없이 유려했다. 한편으로 쓸쓸했다. 지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발 없는 새들은 위태하고 흔들렸다.     

슬픔이 이과수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장국영 때문이기도 했다. 2013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떠난 사람이 허랑방탕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휘젓는 모습이 애잔했다. 그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그가 떠나면서 한 시대를 떠나보냈던 기억도 살아났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삼켰던 어느 만우절의 기억.      

<해피투게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이다.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이란 뜻이다. 보영과 아휘가 나눈, 어쩌면 지독하고 일방적인 사랑 속에서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봄 햇살 같은 순간을 뜻했으리라. 한편으로 장국영의 생애를 함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겹쳤다. 버마에서 핏빛으로 물든 민주화의 봄이, 김기홍 씨와 변희수 하사가 찾아서 떠난 차별 없는 세상이, 장국영과 <해피투게더>가 그린 춘광사설이. 그 모든 것이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 같은 순간을 내포하고 있었다. 


<밤9시의커피>가 할 수 있는 건, 이들 모두의 명복을 빌고 애도하는 일이다. 코로나19로 잔뜩 어두운 구름이 드리운 상황이지만, 우리는 그 틈바구니를 뚫고 봄 햇살을 비춰야 했다. 남은 자의 슬픔을 곱씹으면서, 연대하고 기억해야 했다. 그것은 결국 희망을 적는 일이었다. 코로나19도 감염시킬 수 없는 봄빛을 담아 커피를 내렸다. 커피의 이름은 ‘춘광사설’이다.     

춘광사설에는 힐링? 그따위 것은 없다. 멘토? 그런 것도 취급하지 않는다. 지금 세상이 이상하게 포장해서 파는 힐링과 멘토(링) 따위, 빤한 평가와 조언 따위는 사절하겠다. 오롯이 연대와 희망만을 담았다. 외돌토리(매인 데도 없고 기댈 데도 없는 홀몸), 떠돌이, 허풍선이, 날라리, 양아치, 사사롭고 소속 없는 영혼은 오시라. 세상이 밀어낸 모든 소수자를 위한 해방구 커피, 춘광사설이다.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커피가 전 지구적 연대를 만드는 꿈을 꾼다.     


봄과 4월은 TS 엘리엇의 말마따나 잔인하다. 우리의 역사도 그랬다. 1만 4천여 명 목숨을 앗아간 1948년 제주4·3항쟁, 304명이 희생된 2014년 4·16세월호 참사 등 눈물 머금은 먹구름이 우리 위를 배회한다. 많은 우리는 4월이 아프다. 봄이라는 계절을 만끽하고 봄 햇살을 즐기지만, 봄이 품은 슬픔도 잊지 않는다. <밤9시의커피>가 마주한 봄에 슬픔이 배어 있는 이유다. 아무리 산미 좋은 커피도 때로는 쓰다. 커피에 눈물이 섞여 있어도 양해해 달라. 민주주의를 위한 봄,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봄, 사랑을 위한 봄에 희망을 번지게 하자면 눈물이 첨가될 수밖에 없다.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따뜻한 봄 햇살을 만나자면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아 함께 손잡고 이겨내야 한다. 춘광사설, 당신을 위한 커피가 여기 있다.


커피문예지 <카페인> 기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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