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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athan Feel Nov 30. 2020

창백한 푸른 점 위에 커피로 연결된 우리

[밤9시의커피] 나의 커피로드②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는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_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단풍빛이 뚝뚝 땅으로 스며든다.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보다. 늦가을 정서는 그렇게 그리움이다. 어딘가를 보고 싶고, 어딘가에 가고 싶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닮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계절이다. 바람은 불고 있으나, 세상을 집어삼킨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여전하다. 감염병 시대는 기대와 달리 기약 없이 길어지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마음을 더욱 그리움으로 내몰고 있다.

이제 ‘코로나 이전(BC·Before Corona)’은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됐다. 대신 ‘코로나와 함께(WC·With Corona)’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이전처럼 코로나가 없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외침도 메아리처럼 소멸한다. 이제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야 하는 시절로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 담긴 슬픔과 아련함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어쩌면, 늦가을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곱씹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설혹 그것이 회한일지라도.


다들 돌아가는구나

풀도 벌레도 다들 돌아가는구나

풀들의 집은 어디일까

벌레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우리도 돌아가고 싶구나

따뜻한 등불 하나 켜놓은 집

그립구나 

_ 「늦가을 들판에서」, 윤수천



울퉁불퉁한 세계 속으로


<밤9시의커피>도 이제는 마스크 없이 손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고받는 기운과 에너지는 마스크에 막혀 가야 할 곳에 가닿지 못한다. 커피를 매개로 혹은 핑계로 조곤조곤, 조잘조잘 수다를 떨던 즐거움도 과거가 됐다. 어쩔 수가 없다. 지난여름에서 이어진 나의 동티모르 방랑을 좀 더 이야기할 수밖에.


동티모르에 착지했다는 감흥은 딜리를 차츰 벗어나면서 다른 기대로 갈아탔다. 길이 점점 더 울퉁불퉁해지더니 산악지대로 차츰 접어들었다. 덜컹거렸지만 그것이 되레 모험심을 뭉근하게 달뜨게 만들고 있었다. 어쭙잖게도 인디아나 존스가 된 기분이었달까. 겉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내 안에서 이런 외침이 소극적으로 들려왔다. 그래, 모험은 본격적으로 이제부터야. 커피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와중에 내 삶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 동티모르가 내심 신기했다. “타인의 사정에 무심한 개인은 뿔뿔이 나뉜 자신의 영역 안에서 그들만의 진실을 쌓기 마련이다.” 한 영화평론가가 했던 말이 실감 났다. 한국에서 동티모르 커피를 만나고 마시지 않았다면, 나는 동티모르를 그저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위험한 나라’라고만 여기고 어떤 더듬이를 세울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내 삶에 틈입한 동티모르는 대체 어떤 인연의 고리가 작동했기에 만나게 된 것일까, 궁금했다.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인류는 대폭발의 아득히 먼 후손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알고자, 더불어 코스모스를 변화시키고자 태어난 존재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동티모르와 연결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 사진을 놓고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명명했던 칼에 의하면, 나나 함께 온 사람들이나 동티모르 인민 모두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대폭발의 후손이며 코스모스와 연결된 존재였다. 창백한 푸른 점은 미끈하면서도 울퉁불퉁했다. 아니 미끈한 것은 인류가 문명이랍시고 파괴한 푸른 점의 흔적일 것이다. 울퉁불퉁한 세계가 본디의 코스모스이지 않을까. 울퉁불퉁은 덜컹덜컹과 연결됐고 울렁울렁과 만났다. 동티모르가 몸에 스며들자 낯선 땅이라는 두려움을 밀치고 설렘이 점점 더 크게 자리를 잡아갔다.



커피가 자라는 풍경


산지는 어쩔 수 없이 산지다. 꾸르릉꾸르릉. 차의 꿀렁거림은 당연하다. 처음 만난 이방인을 등짝에 태우기까지 했으니, 차라고 오죽할까. 나도 꿀렁, 차도 꿀렁. 우리는 그렇게 꿀렁거리는 것으로 하나가 됐다. 내 꿀렁거림은 커피를 향한 설렘이었다. 커피는 평지에서 자라지 않는다. 산지형 생물이니까. 그를 만나려면 당연히 인간이 올라가야 한다. 평지형 인간이 산지형 생물을 만나러 가는 길이 평탄하다면? 어울리지 않는다!

 

동티모르의 풍경도 다른 동남아의 것과 크게 다르진 않다. 트럭이든 버스든, 사람을 꾸역꾸역 매달고 다닌다. 뒤뚱거리듯 왠지 불안해도 가기도 잘도 간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차에 매달린다. 갖가지 자세와 표정으로 차에 들러붙는다. 마치 일체형인 것처럼. 달리 말하면, 동티모르는 아직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 사회가 아니다. 자동차가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광범위하게 보급돼 있지 않다. 다행이랄까. 모터리제이션이 본격 진전되면, 자동차를 놓고, 사람을 이쪽과 저쪽으로 분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 차를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어떤 차를 소유하고 있는가로 사람을 삿되게 평가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저항 없는 일상이 된다.


물론 동티모르에도 차는 꼭 필요하다. 나 같은 평지형 인간이 높은 커피 산지를 갈 수 있는 건, 차 덕분이다. 평지형 인간에게 아웃도어 회사의 후원·협찬이 있을 턱이 없잖나. 커피를 만나고픈 마음에 자리한 것은 등정주의도 아니요, 등로주의도 아니다. 오로지, 날 받아달라는 애원과 한없는 겸손이었다. 내 일상을 지배했던 커피를 키운 대지를 만나는 순간을 향한 종종걸음이었다.      


커피는 모순의 시대를 뚫고 분출한 액체였다. 인민이 커피를 본격적으로 들이켜기 시작한 시민사회 형성기로 돌아가 보자. 시민사회를 탄생하게 만든 이념적 동력은 ‘자유, 평등, 박애’였다. 커피라는 검은 혈액의 투여 혹은 흡입이 동력원이었다. 근대 시민의식의 형성은 커피를 일정 부분 빚졌다. 커피하우스에서 이뤄진 작당모의. 커피는 지성을 깨우고(잠을 못 자게 하고), 토론을 빚었다(수다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 시민사회는 자국 울타리에만 머물렀다. 그것도 남성들에게만 허용됐다. 그 시민사회는 완전체가 될 수 없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시민사회의 이념은 울타리 밖으로 나가자 탱자가 됐다. 인종주의나 쇼비니즘이 그것이다. 씁쓸한 모순이다. 자국 내 시민사회를 유지하고자 식민지를 두고, 커피를 마시려고 식민지에 커피나무를 심게 했다. 당시 많은 열강이 그랬다.     

그런 단상도 구름과 안개가 산을 에워싼 풍경 앞에 꼬리를 내렸다. 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저 장엄한 광경이 커피가 자라는 환경이다. 열대의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아비정전>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던 필리핀의 열대우림이 떠올랐다. <아비정전>의 슬픔 띤 정조와는 달랐으나, 동티모르라고 왜 슬픔이 없겠나. 커피나무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차는 오르고 또 오르고 넘고 또 넘는다. 어디에도 같은 풍경이 없으니, 심심하지 않다. 중간중간 쉬면서 나는 나무를 바라봤다. 나무가 품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달렸다. 또 하루를 더 지났다. 오르락내리락 산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커피 열매는 곳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동티모르가 축복한 풍경       


기후위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동티모르를 찾았을 때, 기상이변의 비극은 한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동티모르에도 기상이변이 덮쳤다. 하늘이 뚫린 마냥 10년 만에 최악의 폭우가 닥쳤단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관심이 없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알게 된, 운 좋은 한국인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커피 농사가 흉년이었다. 매년 25~30톤가량 이뤄지던 커피 생산은 1톤으로 크게 줄었다. 자연의 분노는 수시로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 커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에게 커피 열매가 맺지 못하는 현실은 삶 또한 영글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후 벌어졌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회복탄력성이라고 할까. 공정무역이 있었다. 공정무역 단체가 산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커피 노동자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커뮤니티 유지와 생산자(협동)조합 결성 등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나눴다. 궁즉통이었다. 마침, 도서관과 학교 등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었고, 커피 노동자는 그곳에 투입됐다. 공정무역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커피 노동자들은 기상이변에 다행히 삶이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자연의 분노 앞에 인간은 겸허해야 한다. 커피 노동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을 쉬이 원망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해 동안, 커피 향은 약해지겠지만, 몇 년 뒤 도서관의 책 향기가 덧붙여져 더 좋은 향기를 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윤리적 소비는 별다른 게 아니다. 내가 먹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 아는 것. 그래서 세계가 연결돼 있음을 깨닫고, 고마움을 가지는 것. 협동조합 운동은 양이나 이물질 포함 여부를 속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것은 곧 진심을 담았다는 뜻이다.     


적은 양이었지만 현지 노동자들과 커피 열매를 함께 따고 가공 작업을 함께했다. 그들의 노동과 실존을 마주하면서 내 생존의 윤리를 생각했다. 나는 과연 지구와 코스모스에 무리한 부담을 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움직이는 건 아닐까. 아울러 우리는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들이구나. 세계는 지금을 살아가는 무수한 점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동티모르의 속삭임이었다. 커피를 마신다는 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연결됨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우리, 커피 한 잔 할래요?’라는 말에 담긴 관계와 연결의 깊은 뜻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곳에서 내가 커피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하고 있었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_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태어나'


커피문예계간지 <카페인> 기고문


<나는 걸었고, 세계는 좋았다 : 나의 커피로드① 코로나때문에 갈 수 없는 세계를 떠올리며> https://brunch.co.kr/@jonathanfeel/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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