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nathan Feel Nov 12. 2017

늦가을 밤, 쇼(Show)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

[밤9시의커피] 11월 24일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그리며 

너바나가 최고라고우리의 공연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25만 명의 관중을 완벽하게 매료시킬 수 있는 진짜 슈퍼스타는 지구 상에 딱 두 명 있는데한 명은 교황이고 나머지 한 명은 프레디 머큐리다.” _ 너바나 

  

불세출이었다. 좀처럼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목소리. 그 불세출의 목소리가 휘감고 있는 밤9시의커피는 천상의 계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불세출을 듣자니, 때론 몸이 들썩들썩, 때론 마음이 하늘하늘. 이를 함께 흡수하고 있는 커피콩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마음, 11월 24일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콩콩콩콩...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콩볶기, 로스팅을 했다. 흠, 스멜스~ 굿! 탄자니아AA다. 탄자니아 인민들이 자연의 시간과 흐름에 맞춰 빚은 커피다. 아로마와 플레이버, 최상이다. 특별히 공을 들였으니까! 맞다. 밤9시의커피가 평소 다루지 않는 커피다.     


왜? 11월 24일이면서, ‘세컨드 퀸’(Second Queen) 그들이 오는 날이다.

삼인조 밴드로 묶인 그들을 나는 ‘소녀 밴드’ 혹은 ‘프린세스 밴드’라고 부른다. 퀸이 되기 전의 프린세스 혹은 소녀. 이들은 그렇게 불러주면 좋아한다. 꺄르르르르르, 넘어간다. 덕분에 나도 웃는다. 삼십 대 그들에게 소녀라는 호칭은 마법의 주문이다. “어이, 소녀들~”하고 부를라치면, 그들은 어느덧 입가부터 소녀가 돼 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응~ 노총각 아저씨~”라고 응답한다. 최수영 작가는 그랬다. “적어도 서른아홉은, 아직은 소녀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책 《19 29 39》) 살다 보니,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슬픈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슬프지 않다. 더 슬픈 건, 작년과 다른 내가 되지 못하는 것. 어제와 다른 내가 되지 못하는 것.      


그러니까, 이들은 ‘좀 아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이 자신을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는지, 어떤 것에 감동하고 추하다고 생각하는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하여 자신을 모르는 것이 슬픈 것임을 안다. 스스로 힘을 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마음이 삭지 않는 이들은, 그래서 소녀임이 분명하다.


재밌는 건, 이들은 우쿨렐레로 락을 한다고 ‘깝죽댄다’. 아, 깝죽댄다는 표현이 거슬려도 어쩔 수 없다. 이 밴드 노래 중 하나다. ‘우리는 깝죽대는 깝죽이’. 그들 스스로 깝죽댄다고 하니까, 나도 그렇게 표현할 뿐이다.     

“아저씨, 우리 24일에 여기서 공연해도 돼? 많이 시끄럽게 안 할게.”  

“하하, 시끄럽지 않게 한다는 게 말이 돼?”       


그들은 프로 밴드는 아니다. 일종의 직장인 아마추어 밴드다. 아마추어. 기성 정치권력이나 금권과 연계하지 않고 특정 분야와 생계를 연계하지 않지만 오래 관심을 갖고 관련 분야 지식을 축적하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했던가.(《아마추어: 영혼 없는 전문가에 맞서는 사람들》) 그들은 그냥 논다. 그저 즐겁다. 음악성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듣고 있자면 어깨랑 발이 들썩들썩한다.       


커피는 그들에게 검은 혈액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힘은 커피에서 나온다나. 특히 카페인. 미친년들 놀고 있네, 하고 농담을 던지면 맞팔이다. 지랄, 변태 아저씨도 같이 놀잖아, 그러면서. 우리는 그렇게 노는 사이다. 오늘, 그들을 위해 콩콩콩콩 볶는 건, 나의 화답이다. 뭐, 같이 놀자고, 좀 끼워달라고 하는 거지.      


그런데 왜 탄자니아 커피콩을 볶았냐고? 

탄자니아.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하얀 산’이라는 뜻의 킬리만자로를 품은 곳이다. 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을 의미하는 세렝게티가 있다. 탄자니아 하면 떠오르는 그 풍경에 섞인 깔끔하고 부드러운 신맛과 풍부한 바디감. 너트 향이 스며있고, 밸런스도 좋은 커피, 탄자니아AA.       


아는 사람은 안다.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본명 파로크 불사라 Farrokh Bulsara). 그룹 퀸(Queen) 리드보컬이다. 프레디의 고향이 탄자니아다. 그는 탄자니아의 유명한 휴양지, 잔지바르 섬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총독부 소속 공무원으로 종교 때문에 잔지바르 섬으로 이사를 왔고, 1946년 프레디는 태어났다(9월 5일). 프레디는 일곱 살까지 이곳에 살았다. 인도로 유학을 갔던 그는, 1964년 가족 모두와 함께 영국으로 갔고, 그는 가수가 됐다.      


프린세스 밴드는 자주 퀸을 연주한다. 특히, 위 아 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s)이나 위 윌 락 유(We Will Rock You) 혹은 아이 워즈 본 투 러브 유(I Was Born To Love You),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 리드보컬 ‘내멋’이 말을 건넸다. “아저씨, 퀸 진짜 쩔지? 프레디 머큐리처럼 섹시한 남자가 그렇게 일찍 죽은 건 너무 억울해. 하늘이 자기 옆에서 노래를 들으려고 그렇게 일찍 데려갔을 거야. 귀는 밝아가지고.”       


실제로 그렇지 않을까! 4옥타브를 오가는 엄청난 가창력. 비브리토 없는 깔끔한 보이스. 특히 허스키 보이스로 4옥타브를 넘나드는 환상. 나의 화답은 이랬다.      

“하나님이 비틀스에 질려서 그렇게 일찍 데리고 간 거 아닐까? 아니면 하나님이 남자라면, 동성애자이거나. 욕심쟁이 같아, 쯧.”     


그들이 이날 밤9시의커피에서 작은 연주회를 하겠다는 이유는 분명하다. 프레디(의 목소리)가 떠난 날이니까.(1991년 11월 24일) AIDS로 인한 기관지 폐렴이었다. 마흔다섯. 요절이었다. 그는 죽기 전날, 자신이 AIDS에 걸렸음을 시인했다.      


뭐, 상관없다. 그것이 퀸 혹은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 최소한 내겐 그랬고, 이 밴드나 많은 사람에게 그랬다. 죽기 전까지 그는 노래했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기억할 뿐이다. 내가 처음 그의 음악을 접했을 때는 그가 죽은 직후였다. 당시 좋아했던 사람이 카세트테이프에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를 녹음해 내게 건넸고, 그 놀라운 선율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음악은 퀸의 네 번째 음반이자 가장 뛰어난 음반이라고 평가받는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에 실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이 완벽에 가깝다는 명반.     


“아저씨, 프레디가 지금 살아있다면, 믹 재거보다 훨씬 더 섹시할 텐데, 그치? 웃통 벗어던지고 그 허스키한 목소리로 살살 우릴 구슬릴 텐데... 한국에도 한 번쯤 왔을 거고. 아까워, 아까워!”     


프린세스 밴드는 오늘따라 유난히 들떠있다. 얼마 전 개봉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중요한 화제다. 퀸을 결성한 1970년부터 최고의 공연으로 손꼽히는 1985년 영국 웸블리 구장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콘서트까지, 스크린을 통해 퀸의 향연을 실컷 즐기고 온 그들이다. 변두리에서 음악의 꿈을 키우던 아웃사이더에서 전설의 밴드가 된 퀸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다 온 그들이다. 영화에서 프레디 역을 맡은 레미 맬렉은 싱크로율 100%를 자랑했단다.      


탄자니아AA는 극장이 아닌 밤9시의커피에서 즐기는 퀸을 위해 내가 준비한 레퍼토리다. 이날 하루만큼은 밤9시의커피에 다른 메뉴는 없다. 오로지, 하쿠나 마타타.(‘다 잘 될 거야’라는 뜻을 지닌 말로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서 미어캣 티몬이 읊조리면서 널리 퍼졌다.) 잔지바르 섬에 사는 인민은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흥얼거리는 것이 일상이란다. 11월 24일은 그리하여, 퀸 메들리를 들으면서 하쿠나 마타타!       


12월 1일 ‘세계 AIDS의 날’을 앞두고, AIDS에 대한 편견은 줄이되, 또한 위로받아야 할 99% 인민을 생각하며, 11월 24일의 커피는 하쿠나 마타타. 프린세스 밴드도 함께. 이 자리에 못 오는 당신도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와 함께.     


프레디의 고향, 잔지바르 바닷가엔 프레디 머큐리 카페가 있다고 한다. 푸르른 바다를 향해 시야가 탁 트인 카페라고 한다. 푸른 바닷가와 이글거리는 태양이 작렬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아마 프레디 머큐리를 키웠을 것이다. 하나, 정작 탄자니아 인민은 프레디를 잘 모른다고 한다. 프레디의 동상이 있는 곳도 스위스다. 언젠가 탄자니아도, 스위스도 밟아서 프레디를 만나고 싶다.     


늦가을 밤, 퀸 향연의 마무리 레퍼토리는 결코 바뀌지 않을 영원한 마지막 곡이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Show Must Go On). 프레디가 죽기 한 달 전 발표된 퀸의 정규 음반 <Innuendo>에 수록된 마지막 곡이다. 당시 죽어가고 있던 그가 어쩌면 남은 혼신의 힘을 다해 내지른 노래. 오직 프레디만 가능한 짜릿한 고음이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상에 젖게 만든다. 죽음 앞에 선 이가 ‘내가 죽더라도 쇼는 계속돼야 해’라며 살아남은 이에게 건네는 마지막 유언 같아서. 더구나 가사도 죽음을 예견한 듯한 내용을 품고 있기에.      


에피소드는 더욱 짠하다. 이 노래 녹음을 위해 퀸 멤버가 스튜디오에 모였지만 피골이 상접한 프레디 눈치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프레디가 보드카를 들이켜더니 짧은 욕설을 내뱉고 녹음실에 들어가 이 어려운 노래를 한 방에 내질렀단다. 이런 노래를 11월 24일 가을밤의 마무리로 듣는 호사라니. 사람은 가도 역시 노래는 남는 법이다.      


불세출의 프레디를 만든 것에 탄자니아 커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프레디의 목소리라도 남아서 다행이다. 오늘 나는, 프레디를 듣는다. 좋다. 눈물이 난다.      


나는 AIDS다. AIDS는 결코 나을 수 없는 불치의 병이기에 나의 음악과 나의 영혼이 묻혀 함께 이 세상 사라지기 전에 이 사실을 오늘에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팬들과 멤버들을 속여 정말 미안하다. 끝없이 사랑과 죽음을 노래하고 싶었지만 나의 생은 유한한 거 같다. 내가 태어난 고향 잔지바르에서 지금 살고 있는 런던의 생활까지 나는 나 혼자의 생각만으로 살고 있었다. 늘 이기적이기는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언제나 외로웠었다. 나를 다른 백인들과 차별하는 영국인도 끝없이 나를 깎아내리는 평론가들도 늘 지겨웠다. 이처럼 늘 나에겐 함께 해줄 이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이언과 존 그리고 테일러를 만난 것은 정말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내가 검은 문을 열고 무대 밖으로 나가면 팬들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줬다. 나는 무대에서는 늘 외롭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나의 음악보다도 나의 팬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소원이 있다면 팬들은 제발 나의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이 아닌 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언제 떠날지는 모르지만 죽기 전까지 노래하고 싶다. _ 프레디 머큐리의 유언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그해 여름, 하얀 커피 꽃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