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9시의커피] 1900년 빈의 커피하우스와 우리의 촛불을 생각하다
카페 문인이란?
카페 밖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문제를
카페에 앉아 깊이 생각할 시간이 있는 사람이다.
_안톤 쿠(1891~1941, 작가)
늦가을과 초겨울이 교차하는 11월,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 족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일컬었다. 거의 한 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저무는 것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가을 막바지, 찬란하고 쓸쓸한 낙엽은 그 빛을 남김없이 불태우겠지만, 우리는 그 11월에 세상을 바꾸고자 불과 빛을 쏘았던 기억을 품고 있다.
찬란하고 쓸쓸하神 커피하우스
밤9시의커피는 그래서,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을 ‘찬란하고 쓸쓸하神 촛불 하우스’로 꾸민다. 촛불로 밝힌다. 2016년 11월 불타올랐던 기억 때문이다. 2016년 10월 29일 전국 각지에서 박근혜 씨 퇴진 시위가 열렸었다.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_박근혜 시민 촛불’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촛불집회는 11월로 접어들면서 폭발했다.
밤9시의커피도 그때, 촛불카페가 됐다. 촛불시민, 촛불 인민에게 커피 한 잔씩 거들었다. 바깥에서는 11월 1일부터 12일까지 매일 촛불집회가 열렸고, 12일에는 민중총궐기라는 이름으로 106만 명이 촛불로 불태웠다. 이후에도 ‘박근혜 씨 퇴진’을 향한 촛불은 찬란했다. 단풍이 떨어진 세상은 촛불이 내는 빛으로 채워졌다.
아름다웠다. 광화문 등을 다녀오거나 다녀오지 못한 밤9시의커피 단골은 커피하우스에서 재차 촛불을 밝혔다. 카페인은 불타오른 촛불을 다소간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때론 알코올이 촛불을 더욱 불타오르게도 만들었다. 촛불카페는 세상 진동에 따라 지성과 고성, 감성이 오갔다. 교류했고 교감했으며 교차했다. 촛불로 만든 마음 길이 카페를 채웠다.
오스트리아 빈에 유학을 가서 직장생활도 하다가 한국에 돌아온 미은은 당시 열혈 촛불이었다. 촛불이 왁자지껄 모인 어느 밤, 미은이 제안했다. “1900년 전후 빈에 있던 카페는 세기말 빈의 상징이었어요. 사상가, 예술가, 문학가들이 카페에 모여 교류하며 사고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것을 그렸거든요. 우리도 그런 빈에 있는 카페처럼 만들면 어때요?”
모였던 모두 촛불을 들었다. 격하게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밤9시의커피는 촛불이 한국을 밝히는 동안 ‘1900년, 빈’으로 변신했다. 미은을 비롯한 단골들이 함께 꾸몄다. 촛불이 그러했듯 스스로 밤9시의커피를 (세상에 대해) 불온한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찬란하고 쓸쓸하神 촛불 하우스’라고 명명했었다. 대통령을 몰아냈던 촛불 1년을 맞아 올해 그 콘셉트를 다시 가져가기로 했다. 촛불 하우스는 그렇게 지난 1년 전을 기억하고 축하하기로 했다.
1900년, 빈 카페를 떠돌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빈을 ‘음악의 도시’라고만 부르는 건 오만하고 조심성 없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빈을 미술과 공예, 건축과 디자인의 도시이자, 문학과 철학 그리고 심리학의 도시라며 엄청난 정신의 덩어리들이 빈을 채우고 있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만큼 1900년 앞뒤 빈은 위대한 정신을 품은 도시였다.
미술의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건축의 바그너, 올브리히, 호프만, 로스, 음악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 말러, 볼프,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문학의 호프만슈탈, 슈니츨러, 크라우스 등이 당시 빈에서 활약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자란 곳도 빈이다. 1900년 빈에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 인류 정신사는 1900년 빈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미은은 거기서 하나 더 나아갔다.
“빈에 ‘카페의 도시’라는 수사를 하나 더 붙이고 싶어요.” 미은이 붙인 설명에 의하면, 빈은 카페에서 모든 것이 이뤄졌다. 아돌프 글라스브레너는 1836년 이렇게 말했다. “비엔나에서 당신이 ‘어디서?’라고 물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카페에서’이다. 이곳 카페의 유별난 점은 귀족적 분위기가 아니라 지인, 친구, 비슷한 성향의 사람 등을 만나는 편안함이다.”
유럽을 새롭게 열어젖힌 1848년 혁명(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해 전 유럽에 걸친 저항운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 당시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은 빈에서 가장 중요한 카페로 등극했다. ‘국민 카페(Nationalcafe)’로 불릴 정도였다. 카페는 늘 북적거렸다. 몽상과 모반이 공기처럼 떠돌았다. 18세기 몽테스키외가 묘사한 카페 풍경처럼 유토피아적 몽상과 아나키즘적 모반이 피어올랐다.(이탈리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위치한 카페 플로리안에는 ‘모반과 몽상, 마귀와 천사 그리고 공룡을 제외하고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글귀가 걸려있다.) 10년 뒤,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은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문학가 등이 모여 경찰의 밀착 감시를 받기도 했다.
미은은 그런 분위기를 재현하고 싶다고 했다. “세기말 빈은 ‘카페 도시’였어요. 모든 정신들이 카페에서 웅성웅성 시끌벅적, 정신의 촛불을 켠 거죠. 1900년 비엔나에는 600여 개 카페가 있었대요. 대단하죠?” 실제로도 대단했던 빈의 전통 카페 문화는 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을 정도였다.
“와아, 그냥 카페 천국이었네요. 유럽에는 유서 깊은 카페들이 많다고 하던데, 빈에도 그렇겠죠? 미은 씨는 그런 카페들 종종 들렀겠다. 부러워요. 우리도 그런 분위기 확실히 내줘요.” 호연이 맞장구를 쳤다.
“당시 빈은 세계 중심이라고 봐야 할 거예요. 인류 정신사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될 테고. 내가 좋아한 카페는 카페 첸트랄이었어요. 빈 문학의 수도 같은 데라고 할까? 아마 지금도 있을 텐데 카페 입구에 페터 알텐베르크라는 시인의 실물 크기 인형이 손님을 맞이해요. 페터는 워낙 여기를 좋아해서 주소까지 첸트랄로 옮겼대요. 빈에는 ‘3대 카페’라 불리는 카페들이 있는데, 첸트랄도 들어가요. 기준은 알 수 없지만. 나머지 2개는 모차르트가 단골이었던 데멜과 초콜릿 케이크로 끝장인 카페 자허예요.”
미은은 신이 난 듯 자신이 즐겨갔던 카페를 줄줄 읊었다. 정치인들도 자주 들렀다는 카페 란트만 암 링,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젊은 예술가들 아지트였던 카페 무제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데뷔했던 카페 돔마이어,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를 했던 카페 프라우엔후버 등 미은에게 카페는 지성사와 예술사의 오래된 증인이었다. 카페에서 문학사조가 탄생했고 새로운 양식의 회화와 음악, 건축, 사상 등이 꿈틀댔다. 정치와 철학 또한 빠지지 않았다.
카페에서 다시 만나는 세계
미은이 말한 카페들을 언젠가는 찾아가고 싶었다. 특히 내가 유일하게 담고 있는 빈 카페가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였다.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가 전화놀이를 하면서 은근슬쩍 서로의 마음을 고백했던 곳. 카페 슈페를이다. 미은에게 물었다. “카페 슈페를 알지? 거긴 어때? 나 거기 꼭 가고 싶거든.”
미은의 답은 한 마디였다. “짱!” 커피 맛도 짱, 인테리어도 짱, 분위기도 짱. 카페에도 미슐랭이 있다면 자신은 별 세 개를 주겠다고 했다. 1880년 문을 연 이 카페는 여전히, 클래식하거나 로맨틱하단다. 빈티지 인테리어, 벽면을 장식한 흑백 사진들, 오래된 당구대, 각종 종이 신문 등이 카페 슈페를을 빛내는 것들. 오페레타 작곡가 프란츠 헤라르도의 단골 카페였다.
호연도 그곳을 가고 싶다고 했다. “<비포 선라이즈>가 유럽 기차여행의 로망을 마구 심어줬잖아요. 기차여행도 그렇지만 그 카페 신이 무척 로맨틱해서 나도 셀린느와 제시처럼 전화놀이를 꼭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서로 주고받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나잇’이 익어가잖아요. 하하. 역사가 이뤄지는 거지.”
19세기 말 세계의 중심은 두 곳이었다. 프랑스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 두 도시는 음악, 미술, 건축, 패션, 문학, 사상, 철학이 촛불처럼 타올랐다.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예술가, 작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그 두 도시에 집중됐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 카페가 창궐했던 것과 상관이 있었을까.
우리가 2016년 11월을 떠올리며 1900년 빈을 콘셉트로 잡은 이유가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닌 대표 가문이자 6백 년 이상 유지해오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몰락을 앞두고 있었다. 봉건제가 무너지는 대신 시민사회가 도래하고 전제주의가 시효를 다하고 민주주의가 막 피어나던 시기였다. 시대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가 만든 11월에는 부녀 세습 대통령을 몰아내고자 촛불을 태운 시민사회가 있었다. 한 사람 또는 소수가 법·제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주의(자)를 끌어내리고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를 뿌리던 인민들이 있었다.
다시 11월, 우리는 모이기로 했다. 촛불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더 나은 민주주의와 다시 만드는 세계를 위해. 1900년 빈에는 매일 저녁 장르를 초월해 세계관과 예술적 영감과 시대적 감수성을 주고받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카페에서 만났다. 사회에 대해 토론했다. 예술을 감식하고 비평했다. 생각을 주고받았다. 문학을 잉태시켰다. 1900년 빈은 그랬다.
우리도 따라 하고 싶었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 밤9시의커피는 교류하고 뒤섞고 통하는 카페다. 미국 프로야구단 뉴욕 양키스의 황금기를 이끌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요기 베라는 말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확인할 것이다. 카페에서 교류하고 엮이면서 또 다른 싹을 틔우고 또 다른 계절, 다른 세계를 꽃피울 것이다. ‘산책하기 알맞은 달’(체로키 족)에 우리는 함께 마음산책을 나서고, ‘많이 가난해지는 달’(모호크 족)이지만 밤9시의커피에서 교류한 마음은 풍성하기를.
(참고 : 《비엔나 1900년 삶과 예술 그리고 문화》(크리스티안 브란트슈태터 외 지음, 박수철 옮김, 예경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