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버드> 시얼샤 로넌의 얼굴에서 떠올리다
<레이디 버드>를 만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전에 만나면 좋을 영화가 있다. <브루클린>. 물론 두 영화 사이의 혈연관계는 없다. 그저, 한 얼굴 때문이다. 시얼샤 로넌. 두 영화 주인공을 맡은 이 명민한 배우는 ‘좋은 배우의 얼굴이 주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영화를 믿고 보게 만든다는 얘기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 시얼샤는 두 영화 모두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다(수상은 못했지만).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성장영화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고향을 떠올렸고, 지금의 나를 돌이켜봤다.
그리고 질문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러니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을 보면서 <브루클린>의 에일리스(시얼샤 로넌)를 떠올린 건 조건반사였다.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를 떠나 뉴욕 브루클린에 둥지를 틀었던 그는 ‘고향이란 출생지가 아니라 삶을 지어 올린 곳’(영화기자 김혜리) 임을 알려줬었다. 그는 고향 아일랜드(의 마을)에선 별 볼 일 없는 ‘듣보잡’이었다.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떠밀리듯 가야 했던 브루클린에서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생을 차곡차곡 쌓는다. 언니의 죽음으로 다시 찾은 고향 마을에서 그가 받은 환대는 떠나기 전과 딴판이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브루클린에서 겪고 쌓아 올린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사이, 자신의 변화를 되돌아본 에일리스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하나의 스펙터클이었다. 오래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생을 쌓아온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고향에서 오는 서신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에일리스는 브루클린에서 공부와 사랑, 직업, 관계 등을 통해 한 뼘씩 자신의 공간을 확보해간다. 그것은 익숙했던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할 때까지 불안과 흔들림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자신이 쌓아 올린 삶이 자리한 곳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을 드러낸 에일리스의 얼굴. 그 얼굴이 감동으로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삶에 대한 긍정이 묻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버드>가 <브루클린>과 살짝 갈라지는 지점은 이곳이다. 고향 새크라멘토가 지긋지긋한 열일곱 크리스틴.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라는 뻐꾸기를 날리는 천방지축. 어떻게든 뉴욕으로 떠나고 싶을 뿐이다. 부모가 준 이름 대신 ‘레이디 버드’라고 스스로를 명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을 부정하고 싶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엄마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그러니 느닷없는 변덕도 자연스럽다. 갑자기 베스트 프렌드를 버리고 돈 많은 집안의 예쁜 소녀에게 살갑게 다가가 함께 일탈도 즐긴다.
그랬던 레이디 버드가 새크라멘토를 떠난 뉴욕에서 과거 자신(과 고향)을 긍정하고, 깨닫는다. 지금의 나를 키운 것은 불만투성이의 폭풍 사춘기 시절이었음을. 좁고 지루하며 지긋지긋했던 새크라멘토의 일상적 풍경임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엄마의 속 깊은 애정을.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으로 소개한다.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레이디 버드>가 <브루클린>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크리스틴과 에일리스는 자신을 긍정하는 법을 배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통찰하는 성장 서사가 둘을 잇는다. <레이디 버드> 감독 그레타 거윅의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다. “레이디 버드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길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사람이다.”
크리스틴이나 에일리스 모두 특출하지 않지만 특별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시얼샤 로넌의 얼굴이다. 낯선 곳에 도달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이방인이지만, 자신이 서 있는 풍경에 주눅 들지 않는다.(처음에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크리스틴이나 에일리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지 않는 이유다. 과거든 현재든 자신을 긍정하는 성장을 통해 마음의 근육과 심리적 자산을 충전한 그들이다.
무엇보다 나는 크리스틴이 사랑스러웠다. 첫 장면, 크리스틴은 달리는 차에서 엄마와 티격태격하다가 느닷없이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크리스틴이 어떤 인물인지 소개하는 그 ‘럭비공’ 면모는 시종일관 지속된다. 가난한 집,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는 처지, 타인에 대한 부러움 등 자신을 둘러싼 것이 온통 불만인 미운 열일곱.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질풍노도를 겪었기에 그의 밉상 짓이 마냥 미워 보이지 않는다. 뭘 몰랐었던 그때에만 할 수 있는 무엇이니까. 그런 모습에 고개 끄덕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발랑 까진’ 대신 ‘발랄’이라는 수사를 사용할 것이다.
특히 <레이디 버드>의 미덕은 그 시절을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현실 싱크로율 100%의 에피소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고 새처럼 자유로이 날고 싶은 욕망을 담았을지 모를 ‘레이디 버드(Lady Bird)’라는 명명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철부지 시절의 우리를 소환한다.
이 성장 서사가 변곡점을 이루는 지점은 찡하다. 크리스틴이 집을 떠나 새처럼 날아오르기 전, 자신의 방을 하얗게 칠한다.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다짐. 새하얀 캔버스에 그가 앞으로 그려낼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품게 만든다. 어른이 되기 전 우리 또한 그랬던 것처럼. 그것과 맞물려 딸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엄마의 마음도 애틋하다. 딸에게 줄 편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그 마음 깊은 곳.
소녀는 어떻게 숙녀가 되는가,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레이디 버드>는 관객의 성별이 중요하진 않다. 이 흐뭇한 성장담을 보면서 “엄마(아빠)처럼 살기 싫었어”라고 외쳤던 질풍노도를 겪은 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추억 소환 영화가 될 것 같다. 특히 엄마와 딸이 손잡고 함께 보면 좋겠다. <브루클린>의 에일리스에게 도플 갱어가 있다면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이 그 어린 시절이 될 것 같다. 성장은 나이 먹는다고, 경험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거든 현재든 자신이 쌓아온 생을 긍정할 때 성장은 불쑥 우리 앞에 다다른다. 시얼샤 로넌의 얼굴이 내게 알려준 작은 통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