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진 킹 : 세기의 대결>, 지금 우리가 얻어야 할 시사점
"이 경기에서 이기면 모든 걸 바꿀 수 있어."
어떤 여성은 그 등장만으로 시대를 바꾸는가 하면 어떤 여성은 직관적으로 자신의 할 일을 깨닫고 전사가 돼 시대를 바꾼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홀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 분)가 전자라면, <빌리 진 킹 : 세기의 대결>에서 빌리 진 킹(엠마 스톤 분)은 후자다.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닥친 운명을 받아들였던 빌리는 테니스 라켓과 공으로, 남녀차별의 견고한 벽에 강서브를 날린다. 그리고 그 벽을 허물 수 있는 금을 가게 만든다.
발단은 남녀 상금 차였다. 비슷한 관중 동원력임에도 남자들이 권력을 가진 협회의 테니스대회 남자 우승자 상금은 여자 우승자의 무려 8배. 이 터무니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에 빌리는 설 생각이 없다.
그 생각은 곧 동료들을 모아 세계여자테니스협회를 설립하는 실천으로 진전한다. 직접 발로 뛰며 협찬사를 모집, 자신들만의 대회를 연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여성 연대는 소아병적인 남근 연대와 달리 즐겁고 발랄하며 뿌듯하다. 덕분에 콧등이 시큰하고 절로 그 연대에 동참하고픈 감정을 만든다.
차곡차곡 남성 중심 스포츠업계에 균열을 가하며 포인트를 쌓던 빌리의 강서브가 챔피언십 포인트를 획득한 것은 바비 릭스(스티브 가렐 분)와 펼친 남녀 대결이었다. 실화 바탕 영화이기에 결과는 나와있지만(빌리 승) 경기 장면은 흥미진진하다. 세상과 시대를 바꾸고 있는 공의 향방과 그것을 숫자로 보여주는 스코어 덕분이다. 무엇보다 시대를 바꾼 얼굴과 몸짓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빌리라는 피사체가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러나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 여성 상금이 남성과 같아진 것은 2007년이었다. 1968년부터 2007년까지, 40년이 걸렸다. 그만큼 한 번 굳어진, 오래된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바뀌어야 마땅한 것을 혼신을 쏟아 바꿔나가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자신의 커다란 영향력을 세상에 바람직하게 펼친 예였다. 물론 함께 반역에 나선 여성 동료들과 든든한 지원자였던 소수 남성들도 시대를 바꾸는 데 일조한다. 온전하게 혼자 세상을 바꾸는 법은 없다! 빌리가 이룬 성과를 사회혁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말하자면 사회혁신의 분권화가 잘 이뤄졌다.
그런 가운데 빌리를 빛나게 해 준 가장 강력한 카운터 파트너가 있었다.
"여자들의 코트 입장은 허용돼야죠. 안 그러면 공은 누가 줍죠?"
"이 시대 최고의 여자 선수도 은퇴한 나를 이길 수는 없어요."
"여자 테니스 경기는 매우 열등하죠."
이 망언형(혹은 막말형) 개소리를 지껄인 바비 릭스. 현역에서 은퇴한 50대 남성우월주의 꼰대(스스로 남성우월주의자라고 지칭한다). 현역 시절 세계랭킹 1위까지 올랐었던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듯 보인다. 실상은 부인과 장인의 우산 아래 처가살이하는 신세였지만. 허풍선이 남작 같은 그의 허세는 다분히 '나 아직 안 죽었다 쇼'를 만들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의 성격이 다분해 보였다. 이른바 지질한 관종(관심종자 줄임말•타인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부류) 인증.
여자들이 필요한 곳은 부엌과 침대밖에 없다는 바비의 쇼비즈니스 망언은 당대 남성 중심 시대상을 대변한다. 빌리는 이런 파쇼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역사에 기록됐듯, 빌리는 세기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다. 잠깐 위기에 처하나 전반적으로 경기를 압도하는 그의 표정이 시대를 보여준다. 시대가, 세상이 바뀔 것을 그 표정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그 변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심지어 남자들에게도 좋은 변화다.
빌리는 위대한 테니스 선수이자 사람이었다. 여자 스포츠 선수로는 처음 일 년에 10만 달러가 넘는 상금 수입을 올렸다. 그리고 동성애자로서 최초로 이혼수당 재판을 했다. 이는 극 중 이미 남성과 결혼한 빌리가 여자친구를 만나 성 정체성 혼란을 겪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내용이 전체 맥락에 어울리는지 여부에 대해선 왈가왈부가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이것이 극 중 빌리의 감정선과 행동에 영향을 준 요소라고 보기에 긍정적이다. 특히 시대와의 불화에 정면 도전하면서 맞닥뜨린 빌리의 불안과 타인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는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내용을 약간만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바비와 상반되는 남성이 래리다. 빌리 남편인데 그의 처지는 동정을 유발한다. 빌리가 동성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슬픔을 누른 채 빌리 뒷바라지라는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빌리의 사랑은 테니스뿐"이라며 빌리의 여자친구와 자신은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말을 내뱉는 심정을 쉬이 가늠할 수가 없다. 그 심연은 대체 어떠했을까.
빌리로 분한 엠마 스톤 연기는 <라라랜드>보다 더 깊고 좋았다. 엠마는 올해 여성 배우 중에서 가장 출연료를 많이 받는데 몇 년 전부터 제니퍼 로렌스, 나탈리 포트만 등과 함께 남녀 배우 출연료 차별(여성들이 뭔 까닭인지 적게 받는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빌리 주장과 행동에 더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엠마가 빌리를 연기한 덕분도 있다. <라라랜드>에서 나를 매혹시키지 못했던 '배우'엠마는 70년대 '낡음'으로 나를 흔들었다.
나는 영화관 밖에서도 상영을 멈추지 않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여긴다. 즉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거나 생각을 끌어내는 영화. <빌리 진 킹>이 그렇다. (못난 찌질이 수컷들의) 여성에 대한 혐오가 차고 넘치는 지금, 양성평등을 향한 빌리라는 혁신가의 행보는 1970년대라는 배경과 무관하게 시사점을 준다. 여전히 우리는 바꿔야 할 '성 불평등'이 차고 넘친다. 한샘, 현대증권 등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직장 내 성폭력은 '빌리 진 킹'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영화는 빌리 진 킹의 거사 뒤에서 묵묵하게 이를 뒷받침하는 그림자 노동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빌리 진 킹의 강서브, 당신에게 권한다.
아래는 사회운동가, 사회혁신가로서도 활동했던 빌리 진 킹이 했던 말이다. 그는 단순히 훌륭한 스포츠 선수로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에 자신의 역할과 영향력을 바람직하게 발휘한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어야 하고, 그 꿈을 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 말은 사람들이 잘 듣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에, 저는 최고가 돼야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한테 더 많이 말을 걸 테니까요. 최고가 돼야 더 많은 것을 이룬 것일 테니까. 최고가 돼야 나를 위한 판이 깔릴 테니, 최고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했어요."
"나는 말하자면 빗장을 푸는 역할을 했습니다. 내가 최초인 게 정말 많아요. 여자 스포츠 선수로는 처음으로 일 년에 10만 달러 넘는 상금 수입을 올렸고 동성애자로서 최초로 이혼수당 재판을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더 제대로 된 정보로 향하는 문을 열었지요. 사람들은 이제 더 잘 알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다르게 보게 됐지요. 범을 봤어야 범이 되지 않겠어요?"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빈곤층의 70퍼센트는 여성이지요. 그래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마이크로 크레디트가 특히 중요합니다.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통해 21세기는 여성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 기업가 정신이고, 그것이 바로 여성 집단의 팀워크이고, 무하마드 유누스가 그래서 나의 우상 중 한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