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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Sep 11. 2019

9월, 칠레의 계절에 흐르는 혁명과 노래와 詩

당신의 9.11은 어떤가요 


하루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이다.
1년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더 좋은 사람이다.
여러 해 동안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더욱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_베르톨트 브레히트

9월 11일.


#1 2년 전, 

뉴욕 9.11 메모리얼 파크에  테러에 희생당한 이름을 일일이 보면서, 그 이름이 박제되기 전을 상상해보고자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18주기입니다. 지금 그곳에는 2년 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추모를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모여 있겠지요. 장미의 이름을 빌어, 이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3천여 명이 죽은 3천여 건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뉴욕에 비가 내립니다. 



#2 1973년 9월 11일 살바도르 아옌데

그리고 20세기에 등장했던 9.11(1973)은 다른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에 앞선 1970년, 세계사에 유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뿔테 안경을 낀 살바도르 아옌데 씨가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그게 뭐 대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남아메리카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의 실현이었습니다. 혁명이나 봉기가 아닌, 선거를 통한! 1959년 쿠바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칠레는 달랐습니다. '혁명적 민주주의자', 아옌데 덕분이었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왼쪽)와 피델 카스트로의 만남. 포스가 느껴지시는가!


기억하시나요? 2010년 칠레 산호세 탄광이 붕괴돼 700m 지하(섭씨 32도, 습도 95%)에 33인의 광부가 갇혔다가 69일 만에 전원 구조되었던 사건.(2016년 이를 다룬 영화 <33>이 개봉되기도 했었죠!)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에 이런 탄광에서 일했던 광부들도 관련이 있습니다. 칠레 노동운동은 광산촌 광부들에 의해 출발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1917년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이 주도하여 칠레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아옌데까지 명맥을 잇습니다. 


칠레 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이 와인이지만, 칠레에서는 와인보다 구리가 왕입니다. 세계에서 구리 생산이 가장 많습니다. 광업은 칠레에서 가장 큰 산업입니다. 여담이지만 1971년 노벨문학상을 탄 칠레 출신의 라틴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통령이 된 아옌데 씨는 사회주의 경제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와 인민에 천착한 정책을 폈습니다. 대통령 아옌데는 미국(인)이 선점하고 있던 구리광산을 전면 국유화했습니다. 구리광산의 수익은 사회적 자산으로 배당됐습니다. 은행도 예외는 아니었죠. 토지 및 농업개혁이 실시됐고, 어린이에 대한 무료 우유 배급 등도 시행됐습니다. 사회주의는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고민했고, 당연히 있는 자가 아닌 없는 자를 위한 정책에 적극 앞장섰습니다.


문제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열등감 폭발이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사회주의 정권이라니. 심기가 불편한 미국은 온갖 박해와 방해 공작을 폅니다. 이로 인해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의 항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물가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뛰었고, 생필품은 동이 났습니다. 1972~1973년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주의 경제개혁의 실패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치졸한 농간 때문이죠. 칠레 경제의 핵인 구리에 대한 국제 가격을 떨어뜨리고, 아우구스트 피노체트를 앞장 세워 군부 쿠데타라는 비열한 수를 뒀습니다. 


그리하여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하수인 피노체트는 산티아고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아옌데를 겁박했습니다. 투항하라고. 


하지만, 아옌데는 진짜 '리더'였습니다. 

속된 말로, '식빵, 쪽 팔리게 사느니 확 산화하련다!'. 그는 투항하지도 않았습니다. 망명을 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택한 것은 자결이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총으로, 이 '혁명적 민주주의자'는 자신과 칠레의 존엄을 위해 스스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죽기 직전 그의 마지막 라디오 연설을 통해 내뱉었던 말,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모든 것이 압축된 그 말. 그는 칠레 속으로, 인민 속으로, 노동자 속으로 온전하게 스며들었습니다.


아옌데 이후, 칠레는 더 큰 질곡에 빠졌습니다. 민주주의는 사망했고, 인민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범죄자 피노체트가 1990년까지 17년 동안 독재질을 해대는 동안, 3000여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습니다. 우리나라가 처했던 역사와도 겹치죠. 범죄자 출신 통치자와 국정 농단을 일삼던 통치자가 각각 대통령질을 했던 시절의 대한민국, 선량한 시민은 범죄자로 내몰리고, 힘과 돈 듬뿍 가진 범죄자들은 거리낌 없이 사리사욕을 채웠던 통에 인민의 안전과 안녕은 나락에 빠졌습니다.

왼쪽부터, <살바도르 아옌데>,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칠레 전투>


대통령 아옌데의 사회주의 개혁과 최후, 노동자들 투쟁 등을 그린 영화들이 있습니다. <칠레 전투:비무장 민중의 투쟁>. 3부작으로 구성된 이 영화와 함께 <칠레 전투>의 감독인 파트리시오 구스만이 연출한 <살바도르 아옌데>. 구스만 감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살바도르 아옌데가 더 좋은, 더 자유로운 유토피아를 나의 조국에 실현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인생을 결정지은 인물이고,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또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 제목은 쿠데타군이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암호로 라디오 기상 뉴스에서 이렇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민의 마음에 살아 숨 쉬는 아옌데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다큐에 있다고 합니다. 자식들 저녁상을 준비하는 장삼이사인 한 노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정말 위대한 유토피아를 위한 꿈이었다." 인민의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저 말을 아마 제가 직접 들었다면 먹먹할 겁니다. 2008년 칠레 인민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으로 아옌데를 꼽았습니다.

  

꿈을 비전으로 만들고자 했었던 사람, 그것도 인민과 함께 만들어가길 꿈꿨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니스트, 아옌데의 꿈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 탄생 40주년 기념식에서 아옌데 대통령의 딸인 이자벨 아옌데 상원의원은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아울러, <칠레 전투>의 2부 끝장면, 이런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아옌데는 죽었지만 칠레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인민들을 위한 나라는,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저는 사도도 메시아도 아닙니다. 저는 순교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저는 인민이 제게 부여한 과업을 완수하려는 사회적 투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 칠레 절대다수 인민의 의지를 무시하려는 세력이 깨닫도록 할 것입니다.(…) 제게 총알 세례를 퍼붓지 않고는 인민을 위한 정책을 완수하려는 제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저를 죽인다 해도, 인민들이 그 길을 이어갈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저들의 횡포에 섣불리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학살은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도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존엄하고, 더 나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권리,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해선 안 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_ 아옌데가 죽기 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언급한 담화문과 연설 중 


#3 1906년 9월 11일, 사티아그라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무하트마 간디가 3000여 명의 노동자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며 평화적인 시위를 펼쳤습니다. '사티아그라하라'. 진실의 힘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의미합니다. 


9월 , 칠레 꽃 향기


여름이 위태롭게 하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계절입니다. 가을향이 커피를 타고 물씬 흐르는 이 시기, 나는 이렇게 세 개의 9.11을 떠올립니다. 그 어느 해 9월, 나는 칠레 인민을 만나고, 칠레의 공기를 흡수하고 싶습니다. 9월은 온통, 칠레 꽃 향기가 진동을 하는 계절이니까요. 


쿠데타의 피칠갑이 칠레를 휘감고 있을 때, 아옌데의 인민 지향 사회주의가 스러진 닷새 뒤, 또 한 명의 사회주의가 눈을 감았습니다. 칠레 인민을 위한 음악과 연극 활동을 벌이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하는 활동을 벌이며 중남미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이었던 인민 가수 빅토르 하라. 피노체트는 노래로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를 전파하던 그를 살해했습니다. 1973년 9월 16일이었습니다.


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어 
의미를 지닌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 
죽어갈 자의 혈관 속에서 참다운 진실을 노래하면서 
내 노래에는 덧없는 칭찬이나 국제적인 명성이 필요 없다네 
내 노래는 한 마리 종달새의 노래 
이 땅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지 _ 빅토르 하라의 노래 <선언> 中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라가 떠난 일주일 뒤, 칠레 인민 시인이자 라틴아메리카의 시인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1971) 파블로 네루다가 쿠데타와 연이은 동지들 죽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침 그가 몸에 품고 있던 암세포가 자극을 받아 그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1973년 9월 23일이었습니다. 참고로, 네루다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영화 <일 포스티노>(1994)에도 등장하지요. 필립 느와레가 네루다 역할을 맡았었죠. 


왼쪽부터 아옌데, 네루다, 하라

그러니 9월은 칠레의 계절입니다.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만나고, (9월 11일)

빅토르 하라를 노래(Venceremos·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하며, (9월 16일)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를 읊습니다. (9월 23일) 

칠레 와인, 그리고 칠레 커피를 곁들여서 말이죠. 


그렇게 9월, 혁명과 노래와 詩가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칠레에 스며들어도 좋은 날입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날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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