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몬태나>가 가진 미덕과 한계에 대하여
(※ 살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증오와 혐오가 지배하는 마음이 바뀌는 순간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몬태나>는 그 ‘어떻게’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증오하는 존재에게 마음을 열고 생의 또 다른 도약을 찾는 과정을 러닝타임 내내 따라간다. 사실 다른 존재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동료를 죽였던 이(들)라면 더욱더.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우려는 마음 갖기도 쉽지 않건만, 어쩌면 복수해야 할 대상과 함께 길을 걷고 그를 고향에 무사 귀환시키라는 명을 받았다면?
조셉 블로커(크리스천 베일) 대위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20여 년간 충직한 군인으로 복무하고 전역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임무가 떨어진다. 포로로 잡은 아메리카 원주민 샤이엔 족의 추장 옐로 호크(웨스 스투디)와 가족을 고향 몬태나로 호송하라는 명령이다. 침략자(미국)에 맞선 용맹한 전사였던 호크 추장은 암으로 죽음을 앞둔 상태. 조셉은 다분히 정치 이벤트나 다름없는 그 명령이 마뜩잖지만, 어쩔 수가 없다. 군에 복무하는 동안 숱한 원주민을 벤 한편, 동료와 부하를 잃은 그에게 남은 건 피로감뿐. 조셉의 표정과 몸짓에는 그 피로감이 잔뜩 배어 있다.
증오와 혐오를 품고 나선 호송 길. 영화 오프닝에서 포악한 원주민 부족에게 가족을 잃은 가련한 여인 로잘리(로자먼드 파이크)가 합류하면서 영화는 좀 더 풍성한 결을 갖게 된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조셉에 비해 로잘리는 좀 더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을 보여준 덕분이다.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몬태나까지 1000마일의 여정.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의 흐름이다. 원주민에게 증오와 적개심을 품은 주인공들이 ‘적과의 동침’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여정이 마냥 순탄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불편한 동행에 우여곡절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극적인 반전이나 큰 사건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그들의 여정은 저항을 받는다.
몬태나로 가는 길은 단순한 여정은 아니다. 전쟁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고 사람을 얼마나 비참으로 모는지 아는 조셉이지만, 전쟁과 전투가 이어졌다면 아마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길 위에서 삶의 변곡점을 만난다. 예기치 않은 만남과 길이 선사하는 선물이다. 포악한 원주민 부족 등과 같은 공동의 적을 맞닥뜨리자 아이러니하게 적대적이었던 그들은 한 편이 된다. 그리고 길을 통해 믿음과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인간이 아닌 상황을 믿을 수밖에 없는 조건, 철옹성 같던 조셉이 서툴게나마 마음을 여는 장면은 어떤 울림을 안겨준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나는 조셉이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사실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직업과 주어진 임무(일)에 충실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원주민 입장에서 흉포한 살인마이지만, 미국(군대) 입장에서 전쟁 영웅이다. 내가 <몬태나>에서 조셉을 옹호했던 이유는 그의 (변화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증오와 혐오를 품고 있지만, 변화하는 상황과 사건 앞에 ‘이성’을 잃지 않는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리고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상황에 자신을 맞춘다. 호크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그것을 보여준다. 처참하게 가족을 잃은 로잘리 역시 마찬가지다. 호크 가족의 다정함에 그는 복수나 감정이 아닌 다정함으로 그들을 대한다. 조셉이나 로잘리, 호크 가족 모두 고쳐 쓰고 자시고 하기 전에 사람됨을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미국‘적’이다. 영화는 원주민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다. 관객이 감정 이입을 하는 대상은 원주민이 아니다. 호크의 이야기와 시선은 거세돼 있다. 그가 당한 고통과 원주민이 백인 침입자에게 당해야 했던 불행한 역사는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면 조셉은 없어도 될 인물이다. 호크의 서사를 보조하기 위한 MSG에 불과했을 것이다.
미국(이주민)은 화해와 용서를 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진짜 용서는 미국 이전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 대륙)에 살았던 원주민이 해야 할 몫이다. <몬태나>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몰아낸 미국 백인이 잘못했고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온 원흉임을 간간이 드러내지만, 딱 그만큼이다. 원주민 편에서 이야기를 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해자 프레임으로 그려냈을 뿐이다. 원주민의 고통을 사서 얻을 수 있는 평화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첫 문단에서 던진 질문은 잘못됐다. 조셉 혹은 미국 입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증명이다. 증오와 혐오는 원주민에게 먼저 닥친 감정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터전을 무력으로 짓밟고 빼앗은 백인 가해자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애초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에 나선 전범은 조셉으로 상징할 수 있는 백인이다.
물론 그 한계를 반드시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몬태나>는 미국이 행한 악행과 과거를 반성하는 한편 지금 ‘트럼프’로 대변할 수 있는 인종주의와 차별을 넌지시 건드린다. ‘증오와 혐오, 복수가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1000마일의 동행을 통해 알려준다.
나는 미국 사회가 과거 선조의 악행(원주민 학살·추방)을 어떻게 얼마나 반성하고 성찰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몬태나>와 같은 영화가 그것을 기억하고 반성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여기고 싶다. 우리가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듯이 말이다. 물론 단순히 기억만 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성공한 쿠데타(정복)는 처벌받을 수 없다, 는 논리에 순순히 함몰되지 않겠다는 스콧 쿠퍼 감독의 의도라고 믿고 싶다. 스콧 감독은 이 영화와 관련,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와 코맥 맥카시의 소설 《핏빛 자오선》과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수색자>는 백인은 선하고 인디언은 악하다는 고정관념을 허문 작품이며, 《핏빛 자오선》과 《어둠의 심연》은 제국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한 소설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콜롬비아의 대문호이자 4년 전 4.16 세월호 참사 다음날 숨을 거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과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한편으로 ‘미국적’이라는 말은 한국 관객에게 쉽게 도달하기 힘든 지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또 한 가지. 영화 후반부, 힘겹게 몬태나에 도착해서 벌어진 사건은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새로운 가족과 시작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그렇게 해야 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결합한 새로운 시작을 나쁘다고 할 순 없으나, 작위적인 봉합(?)으로 보여서다. 그런 한편으로 크렘린 같은 조셉의 진화가 반갑고 저렇게 맺어진 조합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지만 말이다.
부제를 붙인다면 ‘길 위에서’가 적당할 <몬태나>는 마음(감정)의 행로를 따라가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영화다. 특히 증오와 혐오를 품은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내가 아닌 타인이 품은 고통에 무뎌지지 않고, 타인을 향해 조금 더 열려 있어야 할 것을 알려주는 영화다. 그래서 동료 키더 중위를 잃은 조셉에게 옐로 호크가 했던 말이 남는다. “난 많은 친구를 잃었고 당신도 많이 잃었지. 크나큰 상실이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오는 것이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