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봄날, 세상을 떠난 눈 밝은 작가를 떠올리며
4월 22일의 봄날. 햇살이 좋고, 마음결도 바람 따라 살랑거립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푸른 잎사귀는 조곤조곤 귀를 간질입니다. 그래요 이날, ‘지구의 날’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를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지구의 품 안에서 사람살이를 영위하는 우리는 너무 자주 지구의 수고와 고마움을 잊고 지냅니다. 기실 모든 것을 있게 만든 지구입니다. 꼭 안아주면서 '지구야,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은 날입니다.
1970년 미국, ‘지구의 날’은 시작됐다지요. 앞선 해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기름유출사고가 계기가 됐었죠. ‘데니스 헤이즈’라는 청년 주도로, 이 해 20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행사가 열렸고,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180여 개 나라의 약 5만 개 단체가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과거 토건주의자나 성장지상주의자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지구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기후변화나 미세공해가 삶과 사회를 지배하는 지금, 우리는 지구를 다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변곡점에 와 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이날만큼은 봄바람이 더욱 살갑습니다. 무감동한 낯으로 지구를 대하는 것은 몰염치하게 느껴집니다. '삶'이라는 밥상을 차려준 지구에 감사하고 싶은 작은 마음가짐이랄까요. 그리고 공정무역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김소진. 1997년 4월 22일, 서른넷의 나이로 요절한 눈 밝은 작가. 이날, 지구에서 육체를 소진(消盡)하고야 말았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부질없는 넋두리겠으나, 아마 요절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한국 문단의 큰 기둥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쥐잡기」(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장단편을 거치며 필력과 시선 모든 면에서 꾸준히 상승했습니다. 1996년, 그에게 주어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소설풍과 달리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을 통해 우리네 삶과 시대상을 현실감 있고 감칠맛 나는 언어로 표현했던 그였으니까요. 무엇보다 소외된 약자에 대한 연민을 품고 도시 서민의 낙오와 패배를 일상화시킨 체제를 고발한 그의 눈 밝음은 희소한 가치였습니다.
"김소진을 되살려내는 일은 힘들다. 힘이 필요하다. 한때는 슬픔이 힘이 되었다. 이제는 그리움이 힘이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십 년, 십 년. 매년 봄, 알싸한 향의 복숭아꽃 꽃잎이 눈처럼 흩날릴 때 그를 생각한다. 소진, 너는 내가 모르는 초월적이고 깊은 그 무엇의 일부가 되었다. 잘 있어라." _ 성석제, 「복숭아꽃이 흩날릴 때마다」 중에서 -
복숭아꽃이 흩날릴 때마다, 김소진은 불쑥 찾아옵니다. 6년이라는 짧은 작품 활동에도 불구, 그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장을 새겼습니다. 신문기자로서 일상을 버티고 견디던 그가,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좀 더 웅숭깊은 시선으로 우리네 삶을 다독일 것이라고 여겼건만, 하늘도 그의 재능을 탐냈나 봅니다. 지상에 두기엔 아까운 재능. 우리 중 누군가는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슬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짧은 활동이었기에 아쉽고, 누군가는 그가 없는 무정한 세상을 꿋꿋하게 버텨야 하기에 슬픕니다.
제가 만난 최초의 김소진은, 유작 산문집인 《아버지의 미소》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그 숙제에 대한 김소진의 시선에 훌쩍였던 기억. 그가 유년을 보낸 기찻길 언저리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긴 《장석조네 사람들》은 주변적이고 소외된 것에 대한 애정과 공감을 기저에 둔, 김소진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줍니다. 특히 걸쭉한 입말과 아름다운 순우리말 방언이 화음을 이루며 도시 빈민의 애환과 사연을 감칠맛 나게 전달합니다. 그들이라고 마냥 슬픔만이 기저가 아님을, 건강한 삶의 태도가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장석조네 사람들》은 끈끈하게 보여줍니다.
12편의 중단편이 모인 《자전거 도둑》. 그는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울림 있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내게 아버지란 이도 저도 아닌 개흘레꾼에 불과했다"며 아버지를 향한 기억과 버무려진 아들, 딸, 누이 등 우리네 사람살이가 있습니다. 1948년작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 도둑>과도 맞물리면서, 이 작품은 늘 어떤 세상에서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심어져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를 읽을 때마다 저려오는 통증은. 그는 시대와 삶을 담으면서도, 세상의 속도에 휘둘려 잊고 지낸 무엇을 끄집어내 줍니다. 진부한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의 작품에는 점액질 같은 삶이 있습니다. 마냥 추하지도, 그렇다고 미화되지도 않은 채, 묵묵히 삶을 씹어 삼켜야만 하는 사람의 곤궁함과 비루함. 당대의 트렌드였던 포스트 모더니즘과 거리를 둔 그만의 방식, 즉 김소진의 시선. 그 안에 있었던 뭇별들을 더 이상 지상에서 반짝이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아마, 그래서 일 겁니다. 4월 22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와 더불어 김소진을 떠올리는 것이. 어쩌면 지구에 남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울림을 주는 것 아닐까요. 열린 사회의 적들을 향해, 문학적 필살기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던 눈 밝은 작가는 지금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김소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 충분합니다.
가난과 소외는 애초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개인의 무능이나 게으름, 책임으로 떠미는 것은, 더 이상 지구에서 함께 살기 싫다는 빵꾸똥꾸들의 우격다짐이겠지요. 지구는 우리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생명체 어느 하나, 다른 것으로부터 신세를 지고 있잖아요. 그러니, 합시다. 서로에게 손 내밀기. 지구의 날, 김소진이 떠오를라치면, 옆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손을 내밀어 보자고요.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내게.
그렇게 우리는 지구에 발 딛고 있습니다.
눈 밝은 당신을 떠올리며 지구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장석남 시인이 남긴 당신을 봄처럼 읊조려봅니다.
「새의 자취 - 故 김소진 兄 생각」 _ 장석남
나는 오늘
봄나무들 아래를 지나왔다
푸르고 생기에 찬 햇잎사귀들 사이로
바람은 천년의 기억 속을 들락거리고
나는 그곳을 지나
집으로 왔다
저녁 내내 나는
창문가를 서성거리고 있다
먼 곳에
누군가를 떼어 놓고 온 양 나는
그런 일도 없으면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지면서
나는 왠지
내가 지나온 그 나무들 위에
바람만이, 햇살들만이 그 새살 같은 잎들을
흔들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속에
새가 한 마리 오랫동안
오랫동안
내가 그곳을 지나치는 동안에도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울음 없이
울음 없이 젖은 눈을 굴리면서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명치를 적셔 온다
새는 자기가 깃들였던 자리를 찾았던 것일지
새는
새는
그 찬란한 이파리들을
자기가 기르던 새끼들의
온갖 눈빛들이라고 생각하며
앉아 있었던 것일지
휙
바람 한번 지나면
온 찬란함이
아이 울음으로 뒤바뀌는
폭풍 같은 고요를
삼키는 나무
밑을
나는 지나온 것이다
미망(未忘)으로 길어지는
나무 그림자를
푸드덕 빠져나가는 새
새는 날아갔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새
미명(未明)이 가깝도록 나는 그 언저리를
작은 숨결들과 함께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