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크 크레이지> 리뷰 : 누군가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 살짝 ‘스포일러’ 있습니다. 유의하세요.)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가장 애틋한 순애보는 열 살 소년 샘(토마스 생스터)의 몫이었다. 재혼한 아내와 함께 온 아들 샘을 아내의 죽음 뒤에도 각별히 키우는 아빠 다니엘(리암 니슨)과 샘이 탬즈 강 벤치에 앉아 사랑을 논하던 장면은 압권이었다. 다니엘도 그런 듯했지만 나도 샘의 시무룩한 표정이 엄마가 떠난 슬픔 때문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아뿔싸, 크나큰 오산이었다. 세상 무너질 것 같은 그 표정, 말하지 못하는 짝사랑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소녀에게 말도 못 거는 사랑앓이. 아빠가 안도하는 듯, “좀 안심이 되네. 왜냐하면 나는 더 나쁜 일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이라며 웃는다. 그런 아빠에게 샘은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다. “사랑보다 더 큰 고통이 있나요?” 그것도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그 사랑, 샘에게는 우주적 고민이었다. 그리고 샘은 짝사랑 소녀에게 잘 보이려고 학교 축제 때 선보일 드럼 연습에 바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해하지 마’라는 팻말까지 걸어놓은 채. 엄마의 죽음까지 넘어선 열 살 소년의 사랑. 샘은 된통 앓고 있었고, 나는 된통 맞은 기분이었다. 열 살을 우습게 본 나는 영락없이 잘못했다. 사랑은 열 살, 아니 스물에게도, 혹은 예순, 일흔, 여든에게도 그 무게감이 다르지 않다. 어느 연령대의 사랑이라고 가볍게 대할 것이 아니다.(2017년, <러브 액츄얼리> 14년 후를 그린 시퀄 단편(16분 46초) <Red Nose Day Actually: The Love Actually Reunion 14 Years in the Making>이 유튜브에 공개됐다. 이 시퀄에는 성인이 된 샘과 다니엘이 14년 전 바로 그 장소에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런던 여자 애나(펠리시티 존스)와 LA 남자 제이콥(안톤 옐친)에게도 사랑은 마찬가지였다. 생애를 통째로 바꾸고 걸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고통스러운 무엇. 그것은 사랑이다. 스물 안팎의 이들은 첫눈에 서로에게 반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눈 맞춤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온 첫 순간. ‘세상의 모든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는 영화 카피는 두 사람의 눈빛을 보는 순간, 확연해진다. 세상에 감출 수 없는 세 가지 중 하나, 사랑이었다.
수줍은 눈 맞춤은 사랑으로 진전하고, 여느 사랑의 행로처럼 둘은 행복에 달뜬다. 남의 연애를 지켜보는 건 흥미진진하면서 우리네 사랑을 반추하게 만든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애나와 제이콥.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첫 번째 시련 혹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다름을 두 사람은 보여준다.
런던에서 LA로 유학 온 애나에게 비자 만료 기한이 닥친다. 런던에 가서 비자를 갱신해 LA로 돌아오면 될 것을, 애나는 제이콥과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서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택할 수 있는 결정이다. 침대 위에서 애나와 제이콥이 온갖 포즈를 취해가며 흐르는 사랑의 시간이 뜨겁고도 찬란하다.
물론 그 선택의 결과는 두 사람의 (기대했던) 관계를 비틀기 시작한다. 그들은 아직 모른다. 사랑에 빠진 순간이 아닌 그 이후 오랫동안 맞닥뜨려야 할 사랑을 하는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를. 시작하는 연인에게는 당연하다. 그저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우리. 결국 ‘비자’(로 상징할 수 있는 국경)는 사랑하는 우리를 갈라놓는다.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고, 각기 떨어져 사는 일상의 무게는 종전과 다르다.
각자의 장소에서 자신의 일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애나와 제이콥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허약 체질이다. 감정이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믿은 자들에게 그것은 당황스럽다.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감정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내 안의 독립된 개체라는 사실. 무엇이 사랑인지, 사랑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사랑에 빠진 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명제다.
사랑에 빠졌던 순간이 뒤로 빠진 뒤 찾아오는 시간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어야 그 사랑은 지속 가능하다. 사랑에 빠졌을 때 언약하는 ‘영원’은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지만, 그 이후의 시간을 지속하는 것은 나를 더 깊이 알고 상대와 교감하고 소통하려는 태도(노력)에서 나온다. 허약한 감정을 묻고 일상이 강해진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설가 김연수의 글을 떠올린 이유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_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에서
장거리 연애가 힘들고 서로를 지치게 한다는 것, 애나와 제이콥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둘은 연신 엇갈린다. 다른 시차도 문제지만, 예전 같지 않은 감정과 직업적 성취도 이에 거든다. 비자 문제만 해결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그렇지 않다. 일상을 살다가 불현듯, ‘너 없이 안 되겠어’ ‘역시 너여야만 해’라고 서로에게 탐닉해보지만, 도저한 일상은 사랑이 그저 순탄하게만 흐르게 만들지 않는다. 여느 사랑이 거의 다 그렇다. 티격태격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일상다반사. 주변 사람에게도 그 파장은 미치게 마련이다.
애나 아버지가 ‘결혼’을 권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이 서로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제이콥이 애나에게 에둘러 권하기도 하고,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그(녀)가 없는 자리를 다른 누군가 온전하게 채울 수는 없다. 내 마음에서 차지하는 방이 다를 뿐이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연인들이 겪음직한 숱한 삐걱거림과 흔들림, 그리움과 기다림이 부풀림 없이 묘사한다.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고 뜨거웠던 순간도 잠시. 진짜 사랑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듯, 사랑이 주는 씁쓸함과 아픔, 고통 그리고 지질해질 수밖에 없는 연애의 바닥도 보여준다.
버지니아 울프는 詩 「사랑이란」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랑이란 생각이다/ 사랑이란 기다림이다/ 사랑은 기쁨이다/ 사랑은 슬픔이다/ 사랑은 벌이다/ 사랑은 고통이다/ 홀로 있기에 가슴 저려오는 고독/ 사랑은 고통을 즐긴다’
에밀리 디킨슨도 빠지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의 완전한 고통이다/ 무엇으로도 그 아픔을 견뎌 낼 수 없다/ 고통은 오래 남는다/ 가치 있는 고통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으니까’
<라이크 크레이지>는 자주 흔들리는 핸드헬드를 통해 사랑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물론 흔들리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와중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다. 애나와 제이콥을 연기한 펠리시티 존스와 안톤 옐친은 시종일관 섬세하고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두 사람, 현실 연인 같은 케미를 발산한다. 다만 이미 안톤 옐친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배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향한 애틋함이 더했다. 2011년 만들어진 <라이크 크레이지>를 통해 지금 탑배우로 성장한 펠리시티 존스(<사랑에 대한 모든 것>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등)와 제니퍼 로렌스(<헝거 게임> 시리즈,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등)의 애송이(?) 시절을 만날 수도 있다.
<라이크 크레이지>,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사소하고 짧은 눈맞춤이었다.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던 시절을 관통해 그리움과 기다림, 이별의 우여곡절을 넘어 다시 사랑의 퍼즐을 맞춰보려는 로맨틱한 모험담. 오르락내리락 흔들리는 그들을 보면서 궁금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그대였을까, 그때였을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서로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지만, 사랑했던 인연을 잘라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내 존재가 산산이 부서지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 각자가 ‘너 없이’ 온전한 나로서 살아보는 것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사랑은 아프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만, 상실과 아픔을 품고 꿋꿋이 ‘온전히 나답게’ 살아남는 법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때론 사랑이 없는 시간에서 우리는 ‘나’라는 우주를 정면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 물론 그건 그전에 미친 듯이 사랑했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영화가 마냥 해피엔딩을 예고하지 않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자 문제가 해결됐다고 그들의 사랑이 예전과 똑같이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비자는 그저 맥거핀에 불과하다. 그들은 각자 ‘너 없는 시간’을 관통하면서 서서히 변했으니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사랑의, 아니 인생의 흐름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묻는 것은 사랑에 대한 지독한 환상을 품고 있거나 사랑에 대해 사유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의 게으른 반문일 뿐이다.
아울러 장거리 연애는 어렵지만 성숙한 사람은 그것을 현명하게 푼다. 즉, '혼자 있지만 같이 있다'라고 느끼게 해준다. 그것이 존재감의 역할이다. 애나와 제이콥이 혼란과 우여곡절을 거쳐 좀 더 성숙했다면 아마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은 독립감과 옆에 없어도 같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존재감이 병존하게 만드는 것.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 나는 왜 ‘비자’ 따위의 종이 쪼가리가 왜 멀쩡한 사랑을 갈라놓는지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자본은 국경을 쉽사리 넘나드는데 사람은 그렇게 못하는 세상을 우리는 만들었다.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을 제한한 것은 한 세기밖에 되지 않았다. 1차 대전 중 스파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비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보증했을까.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하고 내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