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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May 24. 2018

꽃보다 케이크, 케이크보다 사랑

[리뷰]  <케이크 메이커>  :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다!

(※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도 있으나 이 글이 영화 감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을 겁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시사회를 관람하고 내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작성했습니다.)


<케이크 메이커>를 마주한 뒤, 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그래 사랑은, 연애는 당사자의 몫이자 선택이야. 그것은 단순하고 확고한 이치다. 사랑에 세상이 강요하는 윤리를 들이대선 안 된다. 누구도 내 사랑이나 연애에 왈가왈부할 수 없듯이, 나도 누군가의 사랑에 세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선 안 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 깨달음을 영화는 다시 확인해줬다. 다시 사랑을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다.


따지고 보면, <케이크 메이커>는 곳곳이 지뢰밭이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지녀온 윤리관 등에 비추자면 말이다. 남편이 불륜에 빠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남편 애인은 남성이다. 남편과 사별한 아내는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한걸음 또 나아가 그 새로운 사랑은 남편 전 애인이다.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 ‘열녀 수절 옹호’ 등을 품은 사람에겐 천인공노할 짓거리다. (경고하건대 이런 사람에겐 <케이크 메이커> 관람이 혈압 오를 일이니 애초 관람을 저어하시라.)

사랑을 잃고 난 뒤


영화는 사랑을 잃은 두 사람이 거니는 마음의 행로를 따른다. 베를린에서 작은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파티셰 토마스(팀 칼코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카페를 연 아나트(사라 애들러).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오렌(로이 밀러)이다. 토마스에겐 띄엄띄엄 찾아오는 연인이었고, 아나트에겐 남편이었다. 그러나 오렌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는다. 하루아침에 연인 혹은 남편을 잃고 상실감을 앓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난다. 연인의 흔적을 찾아 낯선 예루살렘을 불쑥 찾은 토마스가 아나트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덕분이다.


어쩌면 기묘한 조합이다. 남편의 연인이었던 남자가 연인의 아내와 한 공간에서 함께 일을 하는 풍경이라니. 치정극이나 자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질 법한 조합이다. 하지만 <케이크 메이커>는 범인의 속 좁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죽은 남자의 연인과 아내라는 삼각관계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 영화의 미덕이 빛난다.

느닷없이 연인을 잃은 토마스가 예루살렘에 간 것은 상실감을 떨쳐내기 위함이었을까. 처음에는 의심했다. (죽은 자를 향한) 스토킹 같았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하게 정성껏 베이킹하는 토마스의 모습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봤다. 준비 없는 이별이었다. 작별 인사도 없었다. 하루만이라도 준비할 수 있었다면, 미운 기억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홀가분했을까. 휴대폰에 대고 아무리 말하고 사랑을 속삭여도 대답 없는 너. 세상에 드러내 놓고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한 연인을 잃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알지 못한 그의 흔적을 훑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상에 말하지 못한 사랑을 잃고 휘청거렸을 토마스가 선택한 길을 행여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오만이다. 사랑은 물론 상실 이후도 오롯이 당사자의 선택(이자 책임) 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감정의 둑

<케이크 메이커>에서 케이크는 맥거핀이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감정이다. 여느 음식을 다룬 영화가 보여주는 풍경과 다르게 케이크(와 쿠키)에 접근한다. 즉 케이크를 쉽게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는다. 케이크가 사랑을 연결하는 단순한 매개체로 끝나지 않는다. 밀가루를 다지는 과정부터 완성되기까지 연인과 남편을 잃은 자들이 품은 상실, 아픔, 그리움 등이 드러난다. 꾸준히, 우직하게 밀가루를 반죽하고 치대는 토마스의 몸은 감정을 형상화한다.


토마스를 연기하는 팀 칼코프는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놀라울 정도다. 표정 변화가 그다지 없다. 크게 소리치거나 울지 않는다. 눈빛, 눈썹, 입꼬리 등의 변화로 이입하게 만든다. 슬픔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어쩌면 아나트보다 토마스에게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건 그의 얼굴과 몸이 주는 입체감 덕분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은 팀에게 살을 찌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배우 티가 나지 않고 토마스가 남성적이면서도 둥근 실루엣, 단것을 좋아하고 세상사에 미숙한 아기 같은 인상을 주기를 원해서였단다. 

<케이크 메이커>는 그러니 단순한 음식영화가 아니다. 케이크의 스펙터클을 기대하고 갔다가 사랑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면서 나온다. 기묘한 삼각관계나 동성애에서 떠올릴 수 있는 클리셰도 없다. 성 정체성을 다시 깨닫는다거나 게이의 사랑을 긍정하는 등의 익숙한 이야기도 없다. ‘그저,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한 남자를 잃은 남겨진 두 사람이 만나고 케이크를 함께 만들면서 일어난 변화를 지긋이 응시하면 그만이다. 


영화는 여러모로 독특하고 신선하다.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이스라엘과 독일의 합작영화라는 사실도 그렇고, 홀로코스트에서나 만남 직한 독일인과 유대인이 멜로드라마를 이끈다는 점도 그렇다. 종교 계율에 의거한 식품 제조와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 영화, 섬세하다. 토마스와 아나트의 작은 표정과 몸짓만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한 인간에게 닥치는 다양한 감정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이 사랑을 다시 질문하게 만들고 싶은 감독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조건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만이 아님을. 


사랑을 위하여 


행여 <케이크 메이커>가 그린 사랑이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 돌리지 않으면 좋겠다. 동의할 순 없어도 인정하면 좋겠다. 단순하다. 사랑의 모양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성적 취향에 휘둘릴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랑(의 상황)을 좁은 세계에 가둔 채 쉽게 재단하는 우도 범하지 않길 바란다. 

17세기를 살다 간 여성, 니농 드 랑클로는 사랑의 본질을 이렇게 파악했다. “군대를 지휘하는 것보다 사랑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군대의 참모총장, 합참의장, 대장 따위, 별 달고 심지어 차에도 성판 달고 으스대지만 사랑 앞에선 별로 자랑거리가 못된다. 어딜 봐도 사랑 혹은 연애에 대한 고민이 차고 넘친다. 오죽하면 사랑을 배우고 싶어 학원을 다니겠나. 


하나, 명심할 것. 사랑은 꽃밭이 아니다. 천국이 아니다. 백기완 선생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랑한다는 것은 꽃밭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가시밭과 수렁을 헤쳐 마침내 제 가슴의 꽃밭을 일구는 눈물이다.” 사랑을 잃고 상실과 그리움에 지친 아나트에게도, 토마스에게 다시 찾아온 사랑도 그랬다. 사랑은 사랑 외의 모든 것과 맞바꿀 수 있는 질량을 가졌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선택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어떤 사랑도 진부하거나 식상하지 않으며, 상투적이지 않다. 진부하고 식상하며 상투적으로 다루는 게으른 이야기가 있을 뿐. 세상에는 지구에 사는 사람보다 많은 사랑이 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엔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 사랑 이야기가 늘 변주되고 다른 이유다. 흥미를 안겨주는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온전히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다. 세상이 강요하는 윤리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 대신 사랑의 윤리에 따라, 당사자의 선택에 의해 사랑은 흘러가야 한다. 사랑의 윤리가 뭐냐고? 함께하고 싶은 두 사람이 함께할 때, 그것은 옳다. 함께하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이 억지로 함께할 때, 옳지 않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사랑은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가’에 대한 문제다. 사랑은 종종 세상의 윤리를 무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의 윤리가 잘못이라서가 아니라 사랑의 윤리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 어쩌면 위험하다. 토마스가 만든 마성의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가 견고한 보수적인 당신의 사랑관을 사르르 녹일 수도 있으니. 괜찮다,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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