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선언] (2) 블록체인 제네시스 : 1.3. 비트코인 첫 채굴
2008년, 세계 4위 IB 리먼 브라더스 몰락이 가져온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은 어쩌면, 사고의 전환이었다. 혹은 낡은 생각의 파괴였다. 비트코인, 그리고 블록체인도 그 전환과 파괴의 결과물이었다. 리먼을 진앙지로 세계 금융위기가 지구를 덮고 있을 때, 새로운 금융 시스템이 꿈틀댔다.
2009년 1월 3일 오후 6시 15분, 그러니까 정확하게 10년 전, 은행 등 중개자를 없앤 개인 간 전자화폐 시스템인 비트코인이 처음 채굴됐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2008년 9월 내놓은 백서에 따라 처음 내놓은 제네시스 블록이었다. 이 기념비와 같은 첫 블록에 사토시가 새겨놓은 글귀("재무장관, 은행에 두 번째 구제금융 제공 임박")는 의미심장하거나 위트가 넘쳤다. 이 글귀는 같은 날 영국 <타임스> 1면 톱기사 제목이었다. 사토시는 이를 비판하는 한편 기존 금융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리먼 파산 뒤 실제로 미국 정부는 막대한 규모의 금융 구제를 실시했다. 위기 진앙지였던 금융회사들은 세금으로 구제를 받았다. 더 놀라운 것은 나쁜 금융상품을 만든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의 소수 임원은 보너스와 퇴직금 명분으로 200억 달러를 나눠 갖는 등 돈 잔치를 벌였다. 반면 고통은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가 받아야 했다. 2011년 8월 말 미국에서 압류 통보를 받은 주택은 전달보다 7% 늘어나며 9개월 연속 증가하는 등 금융위기 이래 미국인의 삶은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졌다.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지는 부조리가 발생했다. 시민은 분노했고 ‘오큐파이’운동(Occupy Wall Street·월가를 점령하라) 등이 전개됐다.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리먼의 몰락은 닫힌 생각을 깨는 망치였다. 중앙집중형 금융 시스템에 의문 부호가 붙었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갔다. 왜 소수가 금융 의사결정을 독점하며 대부분 이익을 독점하는지, 실패에 대한 피해와 책임은 소수가 아닌 모든 사람이 지는지, 기존 금융 시스템의 불합리와 부조리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리먼 파산과 금융위기의 후폭풍은 시민과 다수 선택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분노는 당연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 왜 책임지고 피해를 부담해야 하는가!
이를 해결하자는 여러 방안이 나왔지만 문제 본질에 다가선 해결책은 쉽게 눈에 띠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비트코인이라는 씨앗 하나가 목마른 대지에 뿌려졌다. 리먼 파산 직후였다. 아직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사토시 나카모토는 논문과 비트코인 소스코드를 통해 블록체인의 여명을 열었다. 그는 조작이 불가능하고 개인 정보를 요구하지 않으며 거래 투명성이 보장되는 통화 시스템을 제안했다. 국가(중앙은행)가 발행하지 않고 은행을 거치지 않는 통화가 비트코인이었다. 비트코인을 구현하는 기술이 블록체인이었다. 중개자가 없었다. 중앙에 특정 주체가 아닌 다수의 참여로 시스템이 유지되는 구조였다. 은행처럼 한 곳에 거래 데이터가 집중될 필요가 없었다. ‘탈중앙화’(decentralized)와 ‘분산화’(distributed)라는 기치가 제시됐다. 원리는 간단했다. 거래 기록을 보관하는 중앙집중형 서버가 없다. 대신 거래에 참여한 모든 사용자가 거래 내역을 볼 수 있다. 데이터가 사라질 우려가 없다. 거래 때마다 정보가 공유되기에 데이터 위조나 변조를 할 수 없다. 투명성과 보안성 확보에 최적이었다. 이에 블록체인은 ‘분산 원장 기술’(Distributed Ledger Technology)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기존 금융자본 권력을 향한 담대한 도전이자 혁신이었다. 기존 중앙집중형 금융 인프라는 관리 비용이 많이 든다. 바이러스나 해킹 등 사이버 공격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만약 중앙 서버가 해킹되면 대혼란에 빠지거나 재앙이 된다. 그러니 은행 등 금융회사는 거래 데이터를 복재해 다른 서버에 분산한다. 2중, 3중 등 다중으로 보안 시스템을 가동한다. 서버 하나가 공격을 받거나 뚫리더라도 다른 서버가 이를 보완한다. 이런 보안 시스템은 구축과 관리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보안과 신뢰가 생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금융 분야에서 인터넷의 발달은 쉬운 거래와 거래량 확대를 불러왔지만 정보 보안을 위한 비용 상승을 가져왔다. 양날의 검이었다.
분산은 힘(권력)이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막는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와 통한다. 탈중앙화, 분산화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구글, 페이스북, 우버, 에어비앤비, 아마존과 같은 일부 거대 플랫폼 기업은 이를 거스른다. 데이터를 독점하고 이익을 독식하면서 권력의 비대화를 꾀하고 개인 자유를 침해한다. ‘중앙화 웹’(centralized web)이 비판받는 이유다. 페이스북은 사용자 동의 없이 개인 정보로 ‘장사’까지 했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명백한 사례다. 인터넷이 가졌던 ‘자유롭고 공평한 정보 접근(정보 민주화)’, ‘권력의 탈중앙화’와 같은 초기 이상과 사회적 비전은 산산이 부서졌다. 공개하고 싶지 않은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고, 절대 공개되지 않을 거라 믿었던 개인 정보가 자신도 모르게 3자에게 팔리고 있다. 인터넷 이용자 프라이버시는 실종됐다.
기실 중앙화는 근대 국가를 중심으로 사회경제 구조를 이룬 뼈대였다. 따라서 탈중앙화와 분산화를 내건 비트코인이 세계 금융위기 정점에서 탄생한 사실은, 사후 해석이지만 의미심장하다. 비트코인은 기존 화폐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넘어 새로운 사회경제 구조를 낳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됐다. 영국 정치학자 존 그레이는 “비트코인이 사람들에게 어필했던 것은 비트코인을 이용하면 위태로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라고 분석했다. 오큐파이 운동 지지자였던 해커 타키는 “비트코인이야말로 완전한 경제적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비트코인은 탄생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비트코인으로 시작한 블록체인(암호화폐)은 하나의 사건이 됐다. 리먼의 파산이 장부 조작을 통한 자본주의 신뢰 붕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면 블록체인의 탄생은 장부 조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병든 자본주의에 메스를 가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보 분산, 중앙집권적 권력구조 해체, 부의 집중을 막는 분배, 자주성을 지닌 자기결정권 확립 등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암호화폐는 화폐에 대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가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물론 블록체인이 혁명의 불꽃이 될는지, 거품 같은 신기루가 될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를 돌아보고 새로운 문명의 창조가 가능한지 묻게 만든다. 그래서 사건이다. 존재가 단절되는 계기를 사건이라 일컫는 데 세상은 어쩌면 블록체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사건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이전 상태로 살아갈 수 없으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리로서 살아간다.
사토시는 2008년 시월의 마지막 날, 리먼 사태 이후 신뢰가 무너진 기존 금융독점 시스템을 중개자 혹은 중앙기구 없는 컨센서스에 의한 자율 신뢰 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대담한 생각을 내놨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이 대담한 생각을 바탕으로 네트워크와 조직, 인프라와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수많은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뒤를 따르고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한 말을 되씹어보자.
“대담한 생각이 먼저다. 그러면 대담한 행동은 반드시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