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선언] (10) 블록체인 정신이 바꿀 수 있는 세상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내뱉는 말이다. 추측하건대, 이 말은 돈이 개입된 거래를 하면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가령 계모임을 생각해보자. 계모임의 가장 큰 위험은 계주가 계원들이 모은 돈을 갖고 도망가는 것이다. 계모임의 신뢰는 한 사람의 변심으로 쉽게 깨질 위험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곗돈을 매개로 한 네트워크도 깨질 수밖에 없다. 기실 계주가 곗돈을 들고 사라졌다는 무용담이 얼마나 많던가. 의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돈이 오가는 거래에서도 의심이 싹튼다. 이 돈이 제대로 전달될까.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이에 중앙에 공신력을 지닌 제삼자가 위치했다. 거래 당사자 간 불신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국가(정부), 은행 등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이 보증을 한 덕분에 돈이 중간에 사라지거나 가치가 훼손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거래와 계약이 이뤄졌다.
비트코인은 그 고정관념에 균열을 가했다. 은행이나 금융기관을 통하지 않고 금융 거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줬다.(다만 비트코인 거래량이 너무 급격하게 늘어나 애초 기대했던 낮은 수수료와 빠른 거래 처리는 힘들어졌지만.) 비트코인에서 시작한 블록체인은 그동안 연결되지 않았던 것들이 연결되고 새로운 영역과 생태계 조성이 가능하다는 점도 증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신뢰와 믿음이 중요한 열쇠 말로 등장했다. 불신 때문에 연결될 수 없었던 네트워크가 생기고 거래가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가치도 생겨나고 있다.
바야흐로 ‘신뢰 네트워크’가 탄생했다. 중앙시스템은 필요 없다. 믿음을 심기 위한 중개인이라는 비효율을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명확한 가치다.
아울러 2008년 금융위기는 거래가 안전하게 이뤄질 것을 보장하던 제삼자를 믿을 수 없게 된 사건이었다. 리먼 파산과 함께 파생 상품을 남발했던 금융 자본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비트코인은 통제 능력과 중개 능력을 상실한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은행을 신뢰할 수 없다면 은행에 맡기지 않아도 되는 화폐를 제안했다. 그리고 중앙 중개상을 배제하고 서로를 믿는 기술을 내놨다. 불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제삼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돈(거래)의 움직임을 증빙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거래 기록도 중앙에 모을 필요가 없다.(탈중앙화)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모두가 나눠 가지면 충분했다.(분산화) 누군가 장부를 조작해도 나머지가 가진 장부와 대조해 조작을 막을 수 있었다. 즉 네트워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기록을 갖고 있어서 기록 불일치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장부를 조작하려면 네트워크에 있는 나머지가 가진 장부를 고쳐야 하므로 이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블록체인은 따라서 ‘불신을 봉쇄하는 기술’이면서 ‘신뢰를 강제하는 기술’이다.
앞서 언급한 계주가 곗돈을 들고 도망갈 위험을 막을 수 있다. 계모임 인원을 100명으로 가정하고 돈을 꺼내는 등 어떤 합의가 필요할 때 51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규칙을 만들었다고 치자. 블록체인 상에서는 한 계원이 돈을 받을 차례가 됐을 때 51명 이상이 동의를 표해야만 돈을 꺼낼 수 있다. 블록체인은 애초 목적 하나가 이중 지불(사기)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계주(리더)도 필요 없다. 시스템 운영은 개인을 통해 이뤄지고 합의한 규칙만 있으면 작동한다. 블록체인은 합의가 만든 약속이므로 개인으로 연결된 네트워크가 스스로 신뢰를 창출할 수 있다. 개인도 중앙 관리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네트워크를 신뢰할 수 있다. ‘합의 알고리듬’(Consensus algorithm)이라는 기술적 장치가 신뢰를 강제한다. 네트워크 참여를 강제하는 기관도, 서류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공무원도 없으니 자율적인 신뢰 구축도 가능하다.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은 데이터 분산이다. 데이터를 블록(block)에 담아 체인(chain)처럼 연결한다. 그렇게 연결된 데이터는 임의로 수정할 수 없고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데이터 위변조를 막는 동시에 거래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 모든 노드(참여자 컴퓨터)가 동일한 데이터를 나눠 저장해 탈중앙화라는 가치를 창출한다. ‘왜 블록체인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가장 간단한 답변은 분산과 탈중앙에 있다.
블록체인이 세계 금융위기 정점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수 금융 권력이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기존 금융시장에 대한 환멸이 커졌으나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던 시절이었다. 비트코인은 과감하게 정부, 중앙은행, 금융회사 등 중앙집중형 권력을 삭제했다. 대신 위변조가 거의 불가능하고 투명한 안전한 기술을 집어넣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이 낮다는 점도 기술적으로 ‘포용 금융’(inclusive finance)을 가능하게 만든다.
기술로 신뢰를 만든다는 구상은 화폐 시스템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신뢰가 없다면 종잇조각에 불과한 지폐를 누가 받아주겠는가. 화폐가 통용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신뢰다. 중앙은행은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고, 은행은 맡긴 돈을 잘 보관하면서 경제 혈맥이 잘 돌아가게끔 필요한 곳에 대출을 잘할 것이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통해 드러났듯이 신용은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고, 은행은 제멋대로 대출에 나섰다. 최근 한국에서 무분별하게 가계 대출에 나선 은행들도 마찬가지다. 2018년 11월 기준 가계 빚은 1500조 원을 넘어섰다.
블록체인이라는 ‘신뢰 기술’은 기존 중간 매개자를 기술적 서비스로 대체한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선사할 것이다. 《블록체인 거번먼트》저자 전명산의 말을 인용한다. “블록체인 기술이 성숙한 수준으로 사용될 경우 우리는 기술이 매개하는 사회, 기술이 매개하는 조직, 기술이 매개하는 경제 시스템 속에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