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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Jan 13. 2019

블록체인이 만드는 디지털 민주주의

[블록체인 선언] (13)  인터넷이 못한 민주주의의 진화를 이루는 방법

자,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블록체인 이전, 큰 변혁을 가져온 인터넷이 등장했던 시기.

1990년대 본격 등장한 인터넷은 새로운 세계와 질서를 예고했다. 당시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와 같은 수식을 달고 자유롭고 공평한 정보 접근성, 권력 분산, 공유와 연결 확산 등을 제시했다. 인터넷이 만든 신대륙은 이전과 다른 신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당초 비전에서 동떨어진 길을 걷고 있다는 평도 나온다. 월드와이드웹(www) 창시자이자 영국 컴퓨터 공학자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는 “인터넷은 괴물이 되었다”라고 비판했다.   

1989년 하이퍼텍스트 기술을 개발한 버너스리는 이 기술을 무료로 공개했다. 다분히 의도가 있었다. 이 기술을 사용하는 모두가 보다 자유롭고 공평한 정보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어 권력의 탈중앙화를 유도하겠다는 의도였다. 그 결정은 인터넷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선의가 늘 좋은 결과만을 낳는 건 아니다. 웹은 거대한 소수가 개인 정보를 축적하고 통제하는 중앙집중형 구조로 재편됐다. 버너스 리는 구글, 페이스북 등은 공룡 기업이 돼 웹을 ‘울타리가 있는 정원(walled garden)’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거대 기업이 정보와 이익을 독점하고 대중을 감시하며 가짜 뉴스가 정치 선전에 이용되는 인터넷을 꿈꾼 게 아니다.” 그는 개인의 데이터 통제권 상실, 가짜뉴스 확산, 투명하지 못한 온라인 정치 광고 범람 등을 웹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솔리드’(Solid) 플랫폼을 내놨다.


분산화를 통한 P2P 네트워크를 실현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출범한 웹이 분명 세계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버너스 리는 지금의 웹이 고립됐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오픈 데이터 물결을 접했지만, 읽고 쓰는 데이터(read-write data) 물결은 보지 못했다. 가령 많은 오픈 정부 데이터도 한 방향 파이프라인을 통해서만 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볼 수만 있을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그는 생산자가 소외된 채 거대 기업이 갖고 있는 데이터 통제권을 개인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하면서 솔리드를 만들었다. 


이에 앞서 인터넷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이는 미국 전기공학자인 배너바 부시(Vannevar Bush)였다. 그는 1945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As We May Think)이라는 논문을 통해 가상 기계인 ‘메멕스’(Memex)를 제안했다. 이 기계는 당시로선 엄청난 정보를 저장하고 필요한 부분을 검색·출력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무엇보다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를 공유한다는 이론적 토대를 내놨다. 당시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이 기술 예측은 ‘하이퍼텍스트’의 원시적인 단계였다. 버나드 리는 이를 실제로 구현했고 페이스북 등 SNS로 발전했다.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기존 패러다임을 뛰어선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한 짧은 논문이 세계를 바꿨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을 제안한 것처럼. 또 공통점이 있다면 ‘정보(데이터) 공유’에 대한 사유다. 기술은 사회 변화를 이끈다. 물론 그 변화가 늘 의도하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니다. 당연하다. 발명자나 설계자 의도와 무관하게 방향을 틀 수 있는 것이 기술이며 사회다. 인터넷이 그랬다. 현대판 아고라(광장)를 꿈꿨던 인터넷은, 어느 정도는 그 문을 열었으나, 장벽에 가로막혔다. 민주주의를 진화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했던 인터넷 기반 투표 시스템은 한계에 부딪혔다. 2007년 독일 해적당은 모든 안건을 전 당원이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 실험을 시도했지만 신원 위변조라는 해킹에 막혔다. 투표가 되레 여론 조작의 도구가 됐다. 대한민국에서도 2012년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후보자를 뽑는 온라인 투표를 시도했지만 조직적인 ‘대리 투표’가 일어나면서 실패했다. 디지털 민주주의 실현은 뒤로 물러섰다.


기술 진보는 한풀 꺾였던 디지털 민주주의의 진화를 북돋고 있다. 블록체인이 바통을 물려받았다. 인터넷이 정보를 축적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인프라였다면 블록체인은 신뢰를 구축하는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정보만 담았던 인터넷에 비해 블록체인은 정보와 가치를 함께 담는 플랫폼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보다 진화한 기술이자 가치를 담고 있다. 


분산과 공유라는 기치를 지닌 탈중앙화는 민주주의와 통한다. 중앙집중형 권력 체계를 거부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기술이 블록체인이다. 실시간 암호화 검증 기술을 통해 ‘신뢰 기반형 민주주의’로 사회 구조를 바꿀 잠재력이 있다. 투표 등 입법, 행정, 사법의 대의 장치도 상당 부분 바꿀 수 있다. 


이미 기성정치에 도전하는 블록체인 민주주의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호주에는 블록체인 기반 정당이 있다. 2016년 출범한 플럭스(Flux)가 그들이다. 블록체인 기반 모바일 시스템을 갖춰 이슈마다 모든 당원(2018년 7월 기준 7000여 명)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한 번 투표할 때마다 일정 포인트를 차감한다. 플럭스 소속 정치인은 당원 결정을 대변하는 역할만 한다. 이들은 ‘투표권 거래제’를 도입, 투표권 양도를 가능하게 만들고 ‘투표하지 않을 권리’도 보장한다. 네이선 스페타로 플럭스 대표는 “누구나 자신이 원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플럭스의 목표”라고 했다. 2017년 창립한 호주 시민단체 마이보트(MiVote)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숙의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이들은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투표를 통해 의제를 결정한다. 이들의 목표는 정치 무관심을 없애는 데 기여하고 시민 중심의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마이보트의 실험은 100만 명 이상 회원을 가진 인도를 비롯해 미국, 스코틀랜드에도 뻗어나갔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시민단체 ‘지구 민주주의’(Democracy Earth)는 블록체인과 결합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소버린’(Sovereign)을 개발했다. 소버린은 분산된 거버넌스 플랫폼으로 코인이 아닌 표(votes)를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지점은 투표권 행사는 물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에 표를 몰아서 사용할 수 있으며 대리인에게 표를 위임하거나 되찾아올 수도 있다. ‘액체 민주주의’(liquid democracy)와 블록체인을 결합한 이 아이디어는 ‘국경 없는 P2P 민주주의’(A borderless peer to peer democracy)를 목표로 한다. 지구 민주주의는 ‘시민 손에 권력을’(Power in your hands)이라는 모토를 갖고 세계 인권 선언에 기반 한 자기 주권(self-sovereign)을 강조한다.

2014년  시민·정당 민주주의를 앞세워 스페인 3당으로 도약한 포데모스(Podemos)도 블록체인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아고라 보팅 Agora Voting)을 만들었다. 블록체인이 정당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고 시민의 민주성을 북돋고 있다. 일본 등에서는 암호화폐를 활용해 새로운 사회 운영 제도를 설계하는 ‘크립토(Crypto) 민주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연방선거위원회(FEC)는 2014년 1인당 최대 100달러 상당을 한도로 암호화폐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했다. FEC는 암호화폐에 위변조가 불가능한 거래 기록이 있음에 착안, 암호화폐 후원금이 정치자금 흐름을 투명하게 파악하기에 더 용이하다고 보고 있다. 같은 해 공화당 뉴햄프셔 주지사 후보였던 앤드류 헤밍웨이가 처음으로 비트코인 기부금을 받았다. 


‘스마트 계약’은 더욱 세련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이미 영국에서 정치 공약과 정치후원금을 연결하는 시도가 있었다. 정치인이 계약서를 쓰고 공약 이행 정도에 따라 정치후원금을 쓸 수 있게 만든다. 공약 이행 여부를 일일이 감시하지 않아도 정치인이 공약을 지키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공약 이행 검증은 물론 로비스트, 정치인 개인의 이해관계가 개입할 여지가 적다. 선출직에 대한 감시 기능을 가진 블록체인 프로젝트도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등이 제시한 핵심 공약을 기록하고 임기 말에 공약 이행을 암호화폐로 평가한다. 공약 이행을 많이 할수록 암호화폐 가치가 높아지므로 암호화폐를 가진 유권자들이 공약 이행을 촉구한다. 암호화폐로 정치적 ‘신뢰’ 자본을 측정할 수 있다.  


서울시도 시 정책이나 지역 커뮤니티 현안 결정 등에 블록체인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기존 전자투표 신뢰성을 높여 직접 민주주의 확대에 나선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 투표 시스템을 구축해 시범사업에 나서고 있다. 중앙선관위는 시범사업 성과를 바탕으로 공직선거 등에도 이를 도입할 예정이다. 정부는 정당 경선, 설문조사, 아파트 동대표 선거, 대학교 학생회장 선거 등에도 블록체인 기반 전자투표가 도입될 것으로 보고 있다. 


탈중앙화는 거대한 흐름이 되고 있다. 행정도 마찬가지다. 중앙에 위치해 하향적, 일방적, 관료적으로 움직였던 행정은 주민 참여를 넘어 주민 자치로 가고 있다. 지역사회 정책을 주민과 함께 결정하고 추진하는 골목 회의 등이 그것이다. 이는 탈중앙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민 삶과 생활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중앙화가 기술(블록체인)과 결합해 직접 민주주의가 더 빠른 속도로 세련되게 열릴 수도 있다.


《블록체인 혁명》 공동 저자 알렉스 탭스콧(Alex Tapscott)은 “블록체인을 통해 시민은 정부 행위를 원장에 기록할 수 있게 되고 힘 있는 소수 간 견제와 균형을 넘어 다수의 합의에 기반을 둔 정책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현재 우리가 가진 최고의 시스템이지만 자신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에게 불신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지금 민주주의 작동 방식의 한계인 대리인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이 블록체인이라고 강조했다. 비트코인이 등장하기 전 암호화폐 개념을 제시했던 암호학자 데이비드 차움(David Chaum)은 “암호화폐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진 기존 권력을 개인에게 분산시키는 수단이며 거버넌스를 어떻게 분산하고 공유할 수 있을지가 암호화폐의 핵심”이라며 “암호화폐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탈중앙화가 모습을 드러내긴 해도 현재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중앙집권적이다. 금융, 기술, 경제, 행정, 공공 인프라 등 거의 모두가 중앙집중화돼 있다. 이렇게 중앙집권화된 제삼자가 정보를 독점하고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수많은 타인을 매개하는 독점적 지위는 돈과 힘을 부여한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에 반한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좀 더 웅숭깊어지려면 탈중앙화 된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블록체인이 그것을 할 수 있다. 

블록체인과 민주주의에는 연결 지점이 있다. 견제와 균형, 합의, 권력 분산 등이 그것이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나 집단이 정보를 독점하거나 운영하는 중앙집권형 시스템에서 벗어나 구성원 간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블록체인의 핵심 원리다. 


블록체인은 중개자를 생략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도를 높일 수 있다. 중개 구조는 개인의 두 가지 자유를 제한한다. 금전적 자유와 정보 선택의 자유다. 이는 곧 자기 결정권과 관련을 맺는다. 블록체인은 민주주의에 깃든 개인의 자유를 다시 끄집어낸다. 블록체인이 지향하는 사회는 따라서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여야 한다. 좀 더 포용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는 신뢰를, 정부는 투명성을 더 해야 한다. 경제와 금융은 이에 자극을 받고 영향을 받는다. 더 나은 세계와 사회를 위한 변화가 블록체인에서 시작되고 있다.


여담으로 지금까지 전개된 블록체인 세계에서 민주주의와 관련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을 이것으로 꼽고 싶다. 네하 나룰라(Neha Narula) MIT 미디어랩 디지털커런시 이니셔티브 교수가 했던 말이다. 

“비트코인에 대한 가장 멋진 점은 개발자가 물러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비트코인에 대해 소유 의식(ownership)을 갖게 됐다. 만약 비트코인을 만들고 시작한 사람이 아직 있었다면 사람들은 비트코인을 갖고 있어도 그런 감정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의문에 싸인 인물(혹은 조직)인 사토시 나카모토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중앙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탈중앙화 코드를 내놓은 사람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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