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9시의커피] 존 레논이 놓고 간 라이터에 얽힌 비밀
17~18세기에 걸쳐 커피하우스는
문학가들의 생활의 중심을 점유하는 동시에,
근대 시민사회의 주민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대중’으로 끌어올리는 데 한몫을 한
‘독자층’을 만드는 거점이 되었다. _ 우스이 류이치로,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중에서
이 남자, 어제도 라이터를 놓고 갔다.
버릇이다. 자주 오는 건 아닌데, 어쩐지 오늘도 왔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혹시 자기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행위인가? 나, 여기 왔다 갔다.
라이터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놓고 간 라이터를 찾아가는 법도 없다. 라이터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이 남자, 풀풀 풍기는 아우라는 딱 예술가다. 어쩌면 예수를 닮은,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와 살짝 엇비슷한, 그러고 보니 히피풍이다. 동그란 안경은 존 레논의 것과 닮았다.
그가 <밤9시의커피>에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온다. 한 번 오면 오래 머문다. 드립 커피를 즐겨한다. 하우스 블렌딩만 마신다. 공정무역 블렌딩. 가치지향과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한 풍모를 풍기는 이 남자. 패스트 패션은 입지 않고 1회용은 절대 활용하지 않는다. 담배는 자주 즐기는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몇 번이나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온다. 라이터가 필수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라이터를 늘 놓고 가는 걸 보면 라이터는 꽤 많나 보다. 나는 이 남자 라이터만 따로 모아놓고 있다. 얼마나 쌓이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영화 <노웨어 보이>로 시작한 이야기
근데, 그가 놓고 간 라이터는 여느 라이터와는 조금 다른다. 예쁘게 생겼다. 세상에 없는 라이터 같다. 이 남자, 평소에 조용히 있더니 오늘은 내게 말을 붙인다.
“아저씨, 예술가들에게 상처나 고통 같은 건, 하나의 액세서리 같지 않아요? 꼭 뭔가 그렇게 있더라고. 그거 없으면 예술가 못해요? 그런 게 있어야 예술이 빛나 보이나? 고통을 예술로 승화했니 뭐니. 한 법의학자는 그걸 창작병이라던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런 유전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하, 예술해요?”
“아뇨, 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 영화 한 편 봤는데, 아저씨 혹시 <노 웨어 보이>라고 봤어요?”
“아, 존 레논?”
“예. 존 레논도 그렇더라고요. 그에겐 ‘엄마’라는 트라우마가 있잖아요. 다섯 살 무렵 엄마가 존을 버리고 이모에게 존을 맡기고 떠나고, 나중에 기껏 만났더니 열일곱에 교통사고로 죽어버리고. 엄마를 두 번 잃은 거예요, 그 남자. 전 그게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오노 요코에게서 엄마를 본 거죠. 물론 전 부인이었던 신시아에겐 안 된 일이지만.”
<노 웨어 보이>는 그러니까,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고 음악에 빠진, 어쩌면 평범한 소년이 어떻게 존 레논이 되고, 비틀스에 이르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정확하게는 비틀스 직전까지만. 엄마를 두 번 잃고, 17파운드 기타로 출발해 폴 매카트니를 만나 비틀스의 전신 ‘쿼리 멘’을 만든 존 레논이 주인공이다.
나도 흥미롭게 봤다. 다만 엘비스라면 모를까, 존 레논이 지나치게 미끈거린다. 내가 아는 존은 담백했는데 말이다. 뭐, 영화 속 존이 엘비스를 좋아해서 그렇게 표현했거니 했다. 영화에는 존이 폴 매카트니를 만난 운명적인 날이 있다. 하긴 그날은 모든 것이 시작된 날이었다. 비틀스의 위대한 탄생이 꿈틀댄다!
존 레논을 만든 퍼즐
이 남자, 라이터를 들더니 불을 붙인다. 하얀 담배 연기에 존과 폴의 만남이 묻어난다. 우리는 어쩌다 존 레논을 논하고 있다. 희한한 일이다.
“이런 만남은 누가 성사시킬까요? 엄마가 느닷없이 당하는 교통사고도 신이 촘촘하게 짜 놓은 시나리오 같고. 뭔가 딱딱 맞물리잖아요. 정교하게 다듬은 비틀스 탄생설화 같았어요.”
맞다. 그 말에 동의했다. 영화는 비틀스 탄생설(실)화다. 물론 오노 요코는 없다. 오노 요코에게 마녀라는 레떼르를 덧씌운 비틀스 마니아들이 좋아할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존에게서 오노 요코라는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하니까. 이 영화에선 아예 그 존재가 없으니 좋아하는 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관계도, 비틀스의 탄생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오노 요코의 자리는 엄마가 대신한다. 존을 만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아, 빠트릴 수 없는 조건이 또 있다. 아빠처럼 존을 지켜주던 이모부의 죽음이 그렇다. 그 모든 것이 ‘존 레논 비긴즈’를 위한 초석이자 디딤돌이다. 이런 퍼즐이 없으면 우리가 아는 존 레논은 없었다.
“존 레논이 라이터를 놓고 온 커피하우스가 있어요. 그 라이터가 마침 레논이 무척 좋아하던 라이터래요. 그것도 바로 전날에 샀던. 사자마자 사랑에 빠졌던 라이터였어요.”
그는 라이터에 얽힌 사연을 툭, 하고 털어놓는다. 하긴 나도 그전에 일부러 묻지 않았다. 찾아가라는 말도 건네지 않았다. 차곡차곡 모아놓고만 있다. 이 남자의 얼굴은 딱히 라이터 행방이 궁금한 얼굴과 몸짓이 아녔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오노 요코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다가 커피하우스에 라이터를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은 걸 알고, 아차차, 했대요. 오노가 돌아가서 가져오자고 했어요. 존이 그러자고 했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요. 내일 또 올 거니까 그냥 가자고.”
그들이 즐겨 찾던 커피하우스가 있는 일본 가루이자와 지역은 여름 리조트였다. 뉴욕의 햄튼과 비슷한 곳이다. 가루이자와 타운에서 자전거로 30여 분 떨어진 소나무 숲에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존과 오노는 아들 션(레논)을 데리고 매일 들릴 정도로 그곳을 좋아했다. 평화가 있었고 행복했다.
그들은 커피하우스 뒷마당에 있는 그물침대를 자주 활용했다고 한다. 그곳에 누워 웃고 노래 부르며 하늘을 바라보며 오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피스~ 그들이 바란 평화. 그 평화의 전 세계적인 전염. 평화에게 기회를!
커피하우스의 그 라이터
그러나, 존이 말했던 ‘내일’은 다시 오지 않았다. 가기로 했던 다음 날, 장마가 시작됐다. 그들은 커피하우스를 찾지 않았다. ‘방콕’했다. 그러다 그곳에 머무는 것에 흥미를 잃고는 뉴욕에 있는 그들의 공간 ‘다코타 하우스’로 돌아갔다. 커피하우스와 라이터는 존이 말한 내일을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라이터만 놓고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평화도 가루이자와에 놓고 갔다. 평화 없는 세상에서, 그들의 뉴욕은 바빴다. 그들은 가루이자와에 다시 가지 못했다. 라이터는 영영 이별인가 보다 했다. 아니, 잊혔다.
“1985년일 거예요. 존이 죽고 5년 후라고 했으니 그쯤 될 거예요. 오노가 거기로 가요. 아마 존과 나눴던 평화와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싶어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커피하우스는 변함이 없었대요. 시간이 멈춘 커피하우스에서 오노는 커피 한 잔을 마셨어요. 그리곤 떠나려는데, 주인이 와서는...”
존이 아꼈던 그 라이터를 오노에게 건넸다. 5년 전, 존이 커피하우스에 놓고 간 바로 그 라이터였다. 주인장은 이리 말했단다.
“당신 남편이 지난번 여기에 와서 두고 간 라이터를 돌려주고 싶네요.”(Your husband left this the last time he was here, I’d like to return this to you.)
오노가 라이터를 켰다. 불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5년 전, 라이터를 두고 간 그날이 라이터가 내뿜는 불꽃 속에 떠올랐다.
인생이란 네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 다 지나가 버리는 거야.(Life is what happens to you while you’re busy making other plans.) _ 존 레논
평화에게 기회를!
“이 일상적인 평범한 일도 예술가들이 했다고 하니까, 뭔가 세상에 대한 메타포 같지 않아요? 우리도 평화를 어딘가에 깜빡 두고 온 채 떠나온 거 아닐까요? 그걸 찾는 것을 내일로 미뤘다가 다시 찾지 못하고 있는... 사실 제가 그래서 라이터를 놓고 가는 거예요. 존 레논이 와서 다시 찾아가라고. 하하. 저는 평화를 다시 찾고 싶거든요.”
역시, 뭔가 있는 것 같더니. 그럴듯하게 들렸다.
정말로 평화는 존이 깜빡 두고 온 라이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Give peace a chance>. 존이 오노와 결혼한 뒤 처음 냈던 싱글 앨범 제목이다. 평화에게 기회를. 존은 그렇게 죽기 전까지 평화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줄곧 노래하고 실천했다.
<밤9시의커피>에 라이터를 늘 두고 갔던 이 남자. 평화를 바라는 히피였군. 라이터가 괜히 정겨워졌다. 나도 평화가 간절할 때는 그 가루이자와의 커피하우스를 찾고 싶다. 그물침대에 누워 어느 날의 오후를 만끽하고 싶다. 그리곤, 긴자를 찾아가는 거지. 백화점 길을 따라 가부키 극장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카페 파우리스타’. 존과 오노가 역시 자주 왔다는 이곳. 시간이 제대로 삭은 느낌의 커피하우스. 어느 날, 이곳에서 나는 ‘War is over’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나 반감이 팽배해 있긴 하지만, 내가 갈 즈음엔 그런 분위기가 누그러졌으면 좋겠다.
그래, 이번 주부터 나는 <밤9시의커피>에 주야장천 존 레논만 틀어놓고 있다. 자체적으로 정한 존 레논 주간이다. 1980년, 12월 8일, 총성이 울렸다. 한 시대를 접는 총알이었다. 그 총알에 맞은 존 레논이 죽었다. 나는 어느덧 그가 박제된 나이를 넘어섰다. 그가 라이터를 놓고 간 때문인지 평화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그 염원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의 커피 메뉴는, War is over(Happy Christmas).
평화를 담아서 내린 커피다.
<밤9시의커피>에 울려 퍼진 존 레논을 듣고는, 일곱 명이 말을 건넸다. 그중 한 손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고맙다며, 굳이 1000원을 더 꺼냈다. 음악 값이라며. 존 레논이 준 선물이로다. 인민에게 권력을.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인민이 우뚝 서 있길.
그러니까, 나와 당신 인민 모두에게, Happy Christmas!
존의 기일과 같은 날, 내 친구 큰별이는 태어났다. 축하하면서도 나는 존을 떠올린다. 존을 추모하는 뉴욕 센트럴파크의 스트로베리 필드를 떠올리며.
“인민에게 권력을! 즉각 인민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란다...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도 못 받고 노동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달라.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다...” <Power To The People> 중에서
(* 카페 문예지 '카페인' Vol.24 기고문. <밤9시의커피>타이틀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