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를 네가 3일만 있다가 떠날 곳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갔다가 다신 안 돌아온다고 생각해봐.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서 3일밖에 못 머물기 때문이야. 마음의 문제야. 그러니까 생활할 때 여행처럼 해.
『여덟 단어』
격렬하게 떠나고 싶은 무더운 여름날이다. 매미는 줄기차게 울어대며 떠날 것을 재촉하고 뜨거운 태양은 지금은 떠나야 할 때라며 무차별 공격을 쏟아낸다. 그럼에도 거실 탁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책을 펼쳤다. 여행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글쓰기였다. 100일 동안 지속된 '매일 한 편의 글쓰기'를 끝내고 나면 개운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숙제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장애물이 많듯글 쓰려고 앉았더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집안일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 며칠 만에 가득 쌓인 수건을 세탁기에 돌린 후 화장실 숨은 곰팡이를 세제를 이용해 말끔하게 닦아냈다. 미뤄두었던 뒷베란다 가스레인지를 반짝반짝 광나도록 닦고 냉장고를 열어 시든 음식재료와 자리만 차지하고 먹지 않은 반찬을 정리했다. 냉동고를 열어 기한이 얼마 남지 않는 음식도 골라 버렸다. 집중해서 집안일을 하다 보니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앞 베란다 건조기에서 수건을 꺼내 화장실 서랍장에 각 잡아넣고 옷을 벗어 문고리에 걸어둔 후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의 차가움에 움찔 놀라 온수를 틀어 물의 온도를 조절한 후 한참 물줄기를 맞았다. 이 순간 여행지에서 만난 폭포수의 짜릿함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개운해진 몸으로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자판에 손을 올려두었다. 처음과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깨끗해진 부엌의 개운함과 샤워 후 시원해진 몸이 주는 청량함이 썩 근사하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맞바람으로 불어온 자연풍으로 시원함은 충분했다.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책을 펼쳤다. 박웅현 작가의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는 문장에 확 끌린 것은 지금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깨끗해진 집안, 시원한 바람, 차가워진 이성, 말랑거리는 감성으로 자판을 두드리자 절로 몰입이 되었다. 까슬거린 햇살이 베란다를 가득 채우자 여행지에서 맛보는 여유로움이 넘실거렸다. 몰입 덕분에 오감이 반응하는 시간인지라 더 이상 작가의 말처럼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자판의 커서가 깜박일 때마다 생생하게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넘어온 매미의 울음소리, 선풍기의 바람 소리, 간간이 들리는 아이들 목소리, 누군가 아파트를 빠져나가기 위한 차 시동 소리, 매미 소리에 질세라 화음처럼 들려오는 산새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춤추는 나뭇가지, 초록이 짙어질 대로 짙어진 나뭇잎의 다양한 색감,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낸 백일홍의 유혹적인 몸짓, 에어프라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소하고 달큼한 단호박 에그슬럿의 냄새, 입안 가득 번지는 블랙 아메리카노, 소파에 누워 늘어지게 하품하다 결국 낮잠 속으로 빠져든 남편이 있는 지금, 난 현실을 여행 중이다. 오늘 하루뿐인 이 여행의 단점은 다시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더 소중하다. 하루뿐이라 달콤하고 풍요롭고 소중한 시간을 온전히 만끽하는 중이다. 오늘을 다시 못 올 여행처럼 흠뻑 빠진다. 다행인 건 아직 오늘 하루치의 여행이 절반이나 남아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