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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Oct 07. 2023

생뚱맞은 고백




퇴근 무렵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 만나 저녁 먹고 오겠다는 전화다. 알겠다 말하고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사무실 밖을 나오니 단박에 쌀쌀함이 몰려왔다. 신기하게 추석 후 선을 긋듯 사늘해진 날씨다. 계절만큼 담백한 이별을 하는 게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질척대지 않는 깔끔함이 자연의 매력이구나 싶다.



집에 도착해 열려있는 창문을 닫고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했다. 오늘은 웬일인지 회사에 생각지도 않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감정 소비가 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아 조지 윈스턴 피아노 연주곡을 틀었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깨끗해서 좋다. 단박에 마음이 풀어졌다. 엊그제 남편이 사준 빨간 스피커다. 핸드폰을 바꾸면서 쿠폰이 생겼고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주겠다는 말에 단박에 빨간 스피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루만 늦었다면 상품권 기한 만료로 사지 못했을 스피커라 별명이 '기적'이다.



음악에 빠져 멍 때리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힘들다."

걸어오는 게 힘들면 태우러 가겠다고 말했다.

"몸이 힘들면 내가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냐? 마음이 힘드니까 그렇지."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냐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뜬금없는 사랑 고백이다.

"박종옥, 사랑한다."

"뭐야? 무슨 일이야?"

생뚱맞은 고백이 걱정되어 다시 물었다. 재차 묻자 그가 대답했다.

"사랑 고백을 한다는 건 내가 술이 취했다는 뜻이지."



전화기 너머로 혀가 꼬인 그가 쌕쌕대며 걸어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힘들면 태우러 갈게."

다시 말했지만 기어이 그는 혼자 걸어오겠다 고집을 부렸다. 마음이 힘들다는 소리에 그의 마음이 짐작되었다. 최근에 혼자 사는 친한 친구를 떠나보낸 그였다. 오늘 만난 친구도, 세상을 떠난 친구가 생전에 자주 모였던 세 가족 중 한 명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도 이제 혼자 남았다.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남편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숨을 쉬며 슬픔에 빠졌다. 오늘도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이야기를 나눴을 테고, 혼자 남은 친구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테다.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지 짐작되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그를 꼭 안았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내 품에 안긴 남편이 힘주어 나를 안았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당신, 많이 힘들었구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내 품에 몸을 맡겼다. 얼굴을 보니 우울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가 팔을 풀더니 또다시 고백 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야."

"왜?"

"행복하니까."

"왜 행복해?"

"그냥."

"그냥이 아니고, 뭔가 있을 거 아냐?"

뭔가 다른 답이 있을 것 같아 다시 물어보니, 그가 못 이긴 척 대답했다.

"박종옥이랑 같이 사니까."

맞는 말이라 답하고 설거지하려고 싱크대 앞에 섰다. 세제를 풀어 그릇을 닦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우리 마누라가 변했네."

"왜?~"

'그래, 그렇지 뭔가 다른 말이 있을 거야.' 잔뜩 기대하면서 그의 대답에 귀 기울였다.

"안 하던 설거지를 다하고 말이야."



웃음이 터졌다. 한번 터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배를 잡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놀리면서 말했다.

"도대체 뭘 기대한 거야?"

"그러게. 술은 당신이 마셨는데 취한 건 나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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