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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Oct 21. 2021

당신의 기억은 믿을 수 있나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p.165)"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 후로...... 그 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 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의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 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p.183)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영화를 본 후 충격이 가지시 않는 상태에서 다시 책을 읽었다. 한 동안 소설 읽는 일에 푹 빠져있던 시간이 있었는데 최근엔 거의 소설을 읽지 못했다. 세상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널렸고 배워야 할 지식이 너무나 많았다. 덕분에 책상엔 읽어야 될 책들이 쌓였고 사고 나서도 읽지 못한 책들이 점점 늘어났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소설을 통해 배우기보다는 자기개발서처럼 대놓고 말해주는 책에 손이 갔다. 독서모임에서 소설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강연자 연지원 작가는 "소설 읽기는 훌륭한 지성 읽기다. 읽는 것을 멈추고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할까 고민하는 것은 인생의 혁명을 일으키는 행동이다."며 소설 읽기를 권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 과거의 기억이 과연 사실일까? 의문이 들었다. 책 속의 주인공 토니의 기억처럼 말이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주인공 토니는 자신이 쓴 편지로 인해 친구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친구 에이드리언의 이야기를 듣고 토니는 살벌한 원망이 깃든 편지를 보냈지만 토니는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의 쓴 원망의 글을 40년이 흐른 뒤에 알게 된 토니는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기억 속의 편지는 둘의 관계를 쿨하게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기억과 달리 둘에게 쏟아내는 저주의 편지였음을 알게 된다. 그것도 40년이 흐른 후에야. 40년 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의 기억이 가짜라는 사실이 토니에게 충격이었겠지만 소설을 읽는 나에게도 꽤나 충격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아니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얼마나 자주 우리를 기만하고 농락하는가. 그런 기억에 의존해 진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성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안이한가."(최세희)가 말하듯 우리의 기억을 얼마큼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재생된 기억이 사실을 기반으로 한 기억일까?' 나 또한 장담하지 못한다. 작가의 말처럼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기억이 마치 진실인 양 믿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른 후 과거의 기억이 믿을 수 있는 사실인지 본인도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연지원 작가는 말한다. 우리의 감각과 해석을 믿지 말길 당부한다. 감정과 감각이 얼마나 믿을 수 없고 허무한 장치임을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된다. 토니처럼 말이다. 토니와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팩트만 받아들여야 하고 사실을 수집하기 전에 판단하는 일도 자제해야 한다. 판단을 먼저 내리면 감정이 생기며 판단이 왜곡된 기억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토니의 왜곡된 기억은 애초부터 인지 하지 못했거나 부주의 때문이다. 또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합리화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세뇌시킨다. 자신의 잘못마저도 정당화하며 자신이 말하는 걸 진실이라 믿게 된다. 조작된 기억에 다시 감정이 생겨난다. 시간이 지나고 세뇌화가 지속되면서 사실이 아닌 조작된 기억이 맞다고 착각한다. 토니의 기억처럼.



그렇다면 "왜곡된 기억에 함몰될 수밖에 없는데 어떡해야 하나?" 그에 대한 답을 연지원 작가는 이성과 감각을 믿지 말길 당부한다. '기억은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이기 때문이다. 이성 또한 논리적 판단을 할 때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우리의 이성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휘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인간의 이기심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두 번째는 감정의 해석보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사실을 수집하는 사람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배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험을 바탕으로 통찰을 늘리고 싶을 때 사실만을 기록한다. 감각과 감정을 몽땅 제거한 후 팩트만을 기록한다. 그렇게 사실만을 기록하다 보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민낯을, 약점을, 찌질함을 제대로 기록해야 '나'를 알게 된다. 세 번째는 사유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길 당부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물을 때 거침없이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린 의외로 자신을 잘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주지 않았거나 나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린 자신을 알기 위해 과거의 행동과 생각을 불러낸다. 하지만 '과거의 나 또한 과연 얼마나 정확한 기억일까?'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된 기억이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니 사실만 기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감정, 감각을 뺀 사실만을 기록하는 일을 한 다음 지난 일기를 다시 읽어보면 자신이 보인다. 개인의 역사 또한 감정을 빼고 사실만 기록한다면 진실된 자신과 만날 수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만을 기록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린 일기를 쓰면서도 나에게 유리하게 쓴다. 누군가와 다툼 후 일기를 쓸 때도 자신을 옹호하는 일을 기록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니 말이다. 승리한 자의 조작된 기록이었다 해도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개인의 역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찌질한 모습을 숨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니 말이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나 또한 토니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되돌아본다. 그동안 믿고 있던 진실이 사실일까? 의문도 품었다. 감정이 들어간 기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사실을 적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세줄 일기'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하루 중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다.



며칠 적다 보니 혼자만 보는 일기조차도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적고 있는데 역사는 어떨까? 반문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자가 승자'라는 말처럼 당연히 승자의 기록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동안 별생각 없이 읽었던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겼다. "이 사건은 누군가에 의해 쓰인 기록일까?" 비판 의식이 생기자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역사에 관심이 없던 나에게는 획기적인 일이다. 덕분에 배워야 할 목록이 하나 더 생겼다. 자신의 삶에서도 역사를 볼 때도 비판의식을 장착한다면 조금 더 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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