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동안 설경을 기대하면서 무주 덕유산에 올랐다. 사 년 전에 만났던 눈 쌓인 풍경을 잊지 못해서 선택한 산행이다. 이번 산행에서는 따뜻한 날씨 탓에 정상에서 만난 잔설로 잠깐 동안 눈을 밟기는 했지만 황홀한 설경은 만나지 못했다. 눈 대신 정상 인증샷을 찍기 위해 향적봉(1,616m)에 늘어선 엄청난 등산객을 만났을 뿐이다. 화들짝 놀랄 만큼 긴 줄이었다.
산을 내려와 숙소에 묵으면서도 덕유산 설경을 보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웠다.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밤새 뒤척이다 새벽을 맞았다. 암막 커튼을 올리자 눈 내린 논과 밭이 거짓말처럼 펼쳐졌다. 그토록 소원하던 눈이 밤 사이 내렸다니 꿈인가 싶었다. 눈 쌓인 들판을 바라보자 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바람이 통한 걸까?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난 후다. 창문을 열어 눈을 만지며 환호했다. 옆에서는 나와 달리 그이는 외진 산골 도로는 눈길이 얼면 위험하다며 걱정이다. 남편의 말을 흘러들으며 마음속으로 제발 흰 눈이 펑펑 쏟아지길 빌었다. 점점 눈발이 굵어지고 있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
그에게 사정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하긴 우리에겐 미끄러운 도로를 맘 놓고 달릴 자동차 체인이 없다.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떠나기 싫은 욕망을 잠재워야 한다. 동네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눈발이 서서히 굵어지더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덮였다. 알 수 없는 건 눈 오는 풍경을 감상할수록 갈증이 커졌다는 점이다. 이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따뜻한 남쪽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 아닌가? 결국 그에게 소리쳤다.
"제발, 차 세워 줘. 부탁이야."
갓길에 차를 세우자 자유를 향해 탈출하는 죄수처럼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몸을 감쌌다. 매섭게 부는 겨울바람 따라 눈발이 휘날렸다. 분분히 흩어져 땅으로 내려앉은 눈송이를 넋을 잃고 쳐다봤다. 고속도로에 떨어진 눈이 마술처럼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
'저건 두려움 없는 곤두박질이야. 태어나자마자 사라질 운명인데 말이야.'
고속도로에 떨어져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눈송이를 보며 잠깐이지만 생성과 소멸에 대해 생각했다. 욕망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을 꿈도 생각했다.
차 안에서 박효신의 야생화가 흘러나왔다. 야생화 노래가 절정에 달하자 눈발도 극에 달했다. 회색 어두운 하늘에서 쌀가루 같은 눈이 쉴 새 없이 흩어졌다. 색깔이 없어지고 밑그림만 남은 마을이 서서히 흰 눈 속에 잠식되었다. 색이 사라진 세상은 순식간에 흑백사진이 되었다.
눈 내리는 무주를 떠나오기 싫었다. 자동차 체인만 있었더라면 출근만 아니었다면 눈 쌓인 산골 마을로 다시 되돌아갔을 것이다. 세상과 단절된 채 딱, 하루만이라도 눈 쌓인 산골에서 자립적인 고립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일까? 여행에서 돌아온 뒤 뒤척이다 잠이 깨면 눈 오는 풍경이 그려졌다. 글 쓰는 지금 다시, 무주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