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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외치는 구호는 마약이다. 본질을 흐리게 하고 뭔가 좋은 느낌은 들게 하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력하게 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기존의 것은 금방 질린다. 마약이랑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인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화이팅"을 나도 싫어하진 않기 때문에 구호 자체는 죄가 없지만,
회사 내에서 너무나 많은 구호가 나타나고 억지로 쓰게 하려다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기를 잃은 개그맨이 억지 유행어를 자꾸 밀어붙이려는 모습과 흡사하여 안타까움만을 자아낸다.
2010년대 중반쯤 비전(vision)이라는 것이 업계를 강타했다.
비전이 있고 임직원들이 이를 공유하는 회사가 혁신과 성장을 일궈낸다는 해외 사례가 비즈니스 리뷰, 경영학 잡지, 신문기사들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너도나도 그럴싸한 비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컨설팅을 받고 직원들을 갈아 넣고 여러 자원을 투입했다.
깨도 짜면 기름이 나오는데, 직원들을 쥐어짜면 당연히 결과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멋들어진 표현, 영어 표현, 감성 넘치는 캘리그래피 등 보고 있자면 내가 마치 Apple에 다니는 직원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이 캘리그래피를 모든 회의자료, PPT 구석에 심어놓고, 아예 텀블러나 손톱깎기, 골프공 같은 회사 물품에도 새겨 넣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모든 직원들이 비전을 모를 수가 없다. 들어온 지 일주일 된 신입사원이라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비전의 공유인가? 내재화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스님의 염불을 따라 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그들의 정신수양이나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조금이라도 따라가기 어렵듯이, 마음과 머리가 동시에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입 밖으로 함께 회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군대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외치던 복무 신조, 나는 꽤 감성적인 인간이어서 그런지 상병 때부턴 복무 신조의 의미를 곱씹고 감동도 살짝 받으며 정말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爲國獻身) 군인의 본분(軍人本分)을 마음속에 깊이 새길 '뻔'한 적도 있다. 그렇게 보면 회사의 구호나 비전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결국 성과다. 결과. 효과. 과연 영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려면 현실을 보아야 한다.
안전을 다짐하기 위해 다 같이 박수를 짝짝짝 치고 구호를 외치고,
현장에서는 분기에 한 번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사업장이라면?
혁신을 마음속에 담기 위해 팔을 뻗으며 만세와 함께 해보자고 구호를 외치고,
정작 신입사원이나 능력 있는 직원들은 더 좋은 회사로 하루라도 더 빨리 나가기 위한 퇴사가 줄잇는다면?
그렇기 때문에 74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초등학생 때, 겨울과 여름방학을 앞두고 그렸던 "방학생활 계획표"라는 원형 파이 차트가 기억나는가?
친구들끼리 비교할 때도 있고, 선생님께 제출도 해야 하던 상황이 많아서 꽤 심혈을 기울여서 계획하고 그리고 꾸미고 색칠하고 마음속으로도 정말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어야지'라고 다짐까지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뇌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매우 순진하다.
그렇게 목표를 정교하게 표나 형태로 만들어서 발표하고, 외치는 것으로서 우리는 동기부여를 얻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 뇌로 하여금 "진짜 달성했나?" 하는 식의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마약이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쾌감과 환각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묵묵히 행동과 실천을 쌓아서 결과를 낸 뒤에 발표하는 것과,
동네방네 난 이렇게 될 거야, 이렇게 할 거야, 저렇게 하겠어, 끊임없이 외친 후에 결과를 내는 것,
어느 쪽이 더 간지 폭풍인가?
회사에서 외워야 할 구호나 비전이 꽤 많으며 이것이 실질적으로 와 닿는 것이 없는가?
당신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언어와 정신적 목표 공유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베테랑 CEO에게도 매우 힘들고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우리는 앉아! 하면 앉고 손! 하면 손을 내밀며 기다려! 하면 참고 기다렸다가 먹어!라는 소리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눈앞의 밥을 맛있게 먹는 것에 대만족 하는 댕댕이가 아니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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