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박 Aug 25. 2020

퇴사 D-73 : 명문대의 멍에

28.

나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역사와 외교를 배웠고 경영이나 경제는 문외한이었다.

나를 볼 때 상사들은 서울대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을 갖고, 비상경 전공에 대한 무시는 전혀 숨기지 않았다.

기대를 할 것이면 밀어주든가, 무시할 것이면 기대를 말든가,

회사에선 사실 내 형편에 맞는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취직을 잘하기 위해 좋은 대학에 가는 학생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10대 때 이미 대학 졸업 시기인 20대 중후반의 취업시장을 내다보고 공부하는 학생들은 내 경험엔 없었다.

보통은 성적 따라, 랭킹 따라, 정말 특이한 경우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특정 학과'를 따라서 간다. 

직설적으로 나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려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것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쌔가빠지게 공부했다고 한다면 정말 섭섭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양성소인가, 아니면 학문의 상아탑인가에 대한 고리타분한 클래식 논쟁으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둘 다 맞고, 둘 다 아니다'라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을 뿐이다. 

의사, 변호사, 하다 못해 병아리 감별사같이, 특정한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는 직업의 경우에는 생각하기 쉽다. 

의사는 명쾌하게 의대. 변호사의 경우 사법 관련 방대한 지식이 필요하니 법대가 유리하긴 하지만, 어느 과든 그 지식만 열심히 배우는 것이 제1 목표일 것이다. 병아리 감별사는 병아리 암수 구분하는 간략한 지식과 스킬을 갖추면 된다. 


그런데 회사는??

자동차 회사 기획팀에 필요한 학과는 어디인가? 

철강회사 영업팀에 가장 잘 맞는 학과는? 광고회사 인사팀을 가려면 꼭 가야만 하는 학과가 있는가? 

실은 그런 것은 없다. 문과 직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상경계열이 그렇게 좋으면 사실 그 두 계열만 뽑으면 된다. (그런 회사가 있다면 제보 바란다.)


회사는 사실 일만 잘하면 된다. 똑똑한 사람일 때 일을 잘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명문대를 선호할 뿐, 회사에서는 결국 일을 잘하는 사람만이 인정받는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기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CEO가 되려면 무조건 경영학과여야 하는가? 

2019년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100대 기업 CEO 중에 경영학과 출신은 5명 중 1명밖에 안 된다고 한다. 

한국 같은 학벌주의 사회에서도 이 정도인데, 그렇지 않은 나라의 경우에는 더 다양한 출신의 CEO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자소서를 참기름 짜내듯 써내고, 인적성검사 다 보고, 1차, 2차, 3차 면접, 그룹면접, 일대다 면접, 다대일 면접, 임원 면접 전부 치르고 입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 실장에게 첫인사를 갔을 때 그들의 표정은 '서울대'에서 밝아졌다가 '역사학과'를 보더니 이내 굳어지고 어두워졌다. "역사나 배운 놈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라고 했다. 

첫인상이란 것이 아무래도 중요한지, 그 인식을 바꾸는 데에만 수개월이 넘게 걸렸다. 그러는 기간 동안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주목받지 않는 학교나 과였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도 물론 있다.


군 시절이 떠올랐다.

서울대생인데 이런 것도 못하냐?라는 핀잔에는 걸레질, 빗자루질, 페인트칠, 용접, 화장실 변기 뚫기, 눈 치우기, 못질과 드릴, 톱질 등등 정말 다양한 Task들이 존재했다. 그나마 엑셀 류의 OS나 영단어 전문지식을 물어보고 나서 핀잔을 주는 것은 양반 중에서도 양반이었다. 


그것을 회사에서까지 당했을 때, 나는 한 때 약해졌었다. 한 때 사랑했던 나의 출신교와 학과를 원망하기도 했다. 당신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출신학과는 당신을 낙인찍는 인두일 수도 있고, 칭찬을 건네줄 장신구가 되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기분은 나쁘다.

당신이 NBA 선수라면, 열심히 훈련하고 연습해서 성공시킨 화려한 덩크슛을 본 사람이

"역시 흑인이라 그런가"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73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대학이 있다. 랭킹이란 것이 현실을 반드시 나타내지는 않는다.

점점 어떠한 일에서건 '보증수표'라는 것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고 싶다. 전무님께, 상무님께,

여러분들의 자녀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의 '비상경 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한다면,

나에게 늘어놓았던 핀잔이나 무시 발언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처음 보는 인간을 판단하는 데에 참고자료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특히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대학 4년간 열심히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다고 한들, 

쓰지 않고 활용하지 않으면 무뎌진다. 그것은 상경/비상경/문과/이과를 가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과 포텐셜이다. 얼마나 일을 잘하는가? 얼마나 성장의 여지가 있는가?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쓸데없는 것을 배운 사람은 없다.

쓸데없는 학문은 없다. 쓸데없는 학위도 없다. 이미 과거이다. 학위란 당신의 지나가버린 약 4년을 담고 있는 하나의 증명서일 뿐, 지금의 당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지금이라도 멍에를 벗어야 한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73

매거진의 이전글 D-74 : 구호마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