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나

빛 아래 잠시 서 있는 사람

by 소구미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여러 역할을 맡으며 살아간다.

각 자리마다 진심을 다하고,

그때그때 주어진 감정을 성실하게 연기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잠시 머무는 슬픔의 주인공이라는 자리다.

이 슬픔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장면에서 맡은 역할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충분히 슬퍼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장면은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걸.

곧 또 다른 역할이 나를 부르고,

나는 다시 새로운 자리로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