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잘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은 저도 막상 친정 없이 지내보는 첫 추석이라 어떻게 될지 기분이 어떨지 잘 모르겠어서 예측이 안됐거든요. 어떤 기분이 들든 어떤 파도가 들이치든 덤덤히 손님처럼 맞아들이자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까진 택배전쟁을 치르느라 쉴 여력이 없었고 마지막 택배의 배달완료 메시지가 뜨는 순간 온몸이 녹아내리더군요. 그래서 딱 하루 아팠습니다. 몸이 지근지근 열댓 명 장정한테 밟힌 거처럼 어찌나 쑤시던지, 가을바람 불어주면 한 번씩 찾아오는 편도선염이 어김없이 또 찾아와 고열에 시달리며 그냥 딱 하루 누워있었을 뿐이었는데 집이 대 환장 파티가 열렸었습니다.
냉장고에 반찬 가득인데 제가 누워 있으면 전원 스위치 고장 난 로버트 마냥 둘 다 허둥지둥, 제 눈치 살피며 기운들이 없어서 제가 맘 놓고 아프지도 못합니다. 오늘 하루 더 쉬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어요. 식은땀 쫄쫄 흐르는데 수건으로 연신 닦아내며 일을 시작하니 몸살도 눈치가 뵈었던지 썩 물러가 주더군요.
노동에 길들여진 육체라 노동으로 스트레칭을 해주면 몸이 또 그런대로 쓸만하게 풀립니다.
하루 아팠던 육신으로 추석 음식 하려니 좀 버거워서 전 세종류와 잡채만 만들었습니다. 밑반찬이야 냉장고에 빠질새 없이 늘 그득 차 있으니 기름 냄새만 적당히 풍겨주면 명절 분위기가 날 거 같았거든요.
식구들 도움받아 산적꽂이 해 놨던 전거리부터 슬슬 시작했더니 온 집안에 풍성한 추석 냄새가 가득 차서 기분이 좋아졌어요. 식은땀이야 좀 흘러주면 어떠냐 싶더군요. 내가 만든 전을 제비 새끼들처럼 젓가락 들고 맛있게 먹어주는 딸이랑 남편 보니 기운이 났어요.
마침 오늘 딸아이 수학 과외 보충이 있었던 덕분으로 선생님에게도 두 접시 나눠드리고 경비아저씨에게도 한 접시, 딸아이의 수시 접수할 때 엄청난 공부를 시켜준 지인분에게도 한 보퉁이 싸두고 시댁에서 먹을 음식도 싸 놨더니 그 많던 부침들이 다 사라졌어요.
다들 맛있게 너무 맛있다고 기뻐해 주니 이게 꼭 친정에서 떠들썩하게 친정붙이들과 명절 음식 안 만들어도 기쁨이 꽤 가득 가슴에 차올랐습니다.
우리 식구 이틀 먹을 음식 빼놓고 두 접시 정도가 넉넉하게 남길래 이건 냉동을 시켜야 하나 고민했는데 여유분도 아주 맞춤의 집으로 배달이 가능했습니다. 딸아이의 친구가 아파트 건너동에 살고 있는데 명절 음식 먹고 싶다고 문자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중학생 때 일찍 돌아가셔서 몇 년째 제대로 된 명절 음식 먹어본 기억이 없다는 카톡 내용에 냉큼 여유분의 전이랑 잡채를 가득 싸서 보내줬습니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이 곳곳으로 전해져서 반가운 ‘정’으로 인사를 나누게 된 거 같아서 오늘 굉장히 뿌듯했어요. 비록 친정 가는 길의 지루함도 내가 살던 고향의 청량했던 새벽 공기도 이젠 경험해볼 수 없지만 ‘나’ 다운 나름대로의 추석 연휴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종일 기뻤는데 남편은 남편대로 본가에서 속이 상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남은 산적이랑 동그랑땡으로 우리 세 식구만의 파티를 했습니다. 평생 사이가 안 좋으셨던 시부모님이 명절 앞두고 부부싸움을 벌이셨는데 큰 시누는 남편에게 아버님을 알코올 병동에 강제로 입원시키자고 난리난리가 났던 모양입니다.
이제 법이 바뀌어서 본인 동의 없이는 강제 입원이 안 되는지도 모르는지 그 잔인한 짓을 왜 남편에게 전가시키며 안 한다고 난리를 부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 다 덮어두고 우리 가족들만의 저녁 담소에 위로받았던 저녁시간입니다.
어느 집이나 꺼내놓지 않아 그렇지 사연 없는 집이 있을까 싶네요. 남편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딸은 공부하러 방에 들어가고 저는 또 손이 심심해서 괜히 멸치나 다듬고 있다가 다른 분들은 어떻게 명절 연휴의 하루를 보내셨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시댁에서의 속상한 일이 있긴 하였지만 오늘의 제일 큰 수확은 나눔의 기쁨입니다. 다른 추석엔 하나라도 더 많이 친정붙이에게 가져다 주려 했던 것들을 내 주위의 고마운 분들과 나눠먹었습니다.
그게 은근히 절 웃음 짓게 하고 마음이 뿌듯해져서 심장에서 뽀독뽀독 개운한 소리가 날 듯하네요. 그렇게 나눠 먹으며 지내다 보니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음식이 없나를 고민하다 보니 별로 쓸쓸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전 종류와 잡채만 만들었는데 내일은 오늘 못다 한 나물을 좀 몇 가지 만들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산에 올라가 먹으려고 합니다. 남편도 좋다고 하네요. 이렇게 지내면 되죠 뭐~
다행입니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고 친정붙이들 생각 안 나서 다행이고 눈물 안 나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꽤 잘 지냈더니 다행입니다. 다들 마음 즐겁고 건강한 추석 연휴 보내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