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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r 27. 2020

딸기청을 담고 싶었던 날

오래간만에 어깨가 가뿐했습니다. 도마 위에 올려놓은 딸기를 깍둑깍둑 신나게 다져갈수록 부엌 안에 달콤한 딸기향이 진하게 번져갑니다.

어깨가 이만큼만 안 아파도 살 거 같다는 생각이 드니 너무 신이 나더라고요. 두 달간의 오십견 고생 기는 눈물겹게도 홀로 분투였습니다. 참 이게 어디가 심각하게 부러져서 아픈 것도 아니고 중병이 걸린 것도 아닌데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병을 앓으니 마음에 우울감이 차곡차곡 페이스트리 빵처럼 쌓이더란 말입니다.

저조차도 오십견은 단순히 나이가 들면 찾아드는 근육통이나 노화쯤으로 생각하였던 옛날의 시간을 반성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밤이 되면 오십견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왼쪽으로도, 아픈 오른쪽으로도 돌아누울 수가 없고 반듯하게만 누워 잠을 청하자니 답답해 죽겠는데 그것마저도 두어 시간 밖에 잘 수가 없었거든요.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잠을 깨서 거실로 나와 주저앉아 혼자 운 날도 많았습니다.

도수치료, 통증클리닉, 마사지 샵 등등을 전전했습니다. 다행히 성실히 치료해주시는 치료사분을 만나 어깨가 꽤 많이 호전되어 가는 중입니다. 만세도 할 수 없고 뒷짐은 더더군다나 안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타이핑이었거든요. 이제는 만세 동작은 통증 없이 완벽하게 되고 드라이기도 맘껏 들고 젖은 머리를 말릴 수가 있습니다.

어깨가 아파서 제일 힘든 게 뭐였냐고 누가 물으면 우습게도 화장실 수전을 제대로 닦아내지 못하는 거였다고 고백할 거 같습니다. 늘 반짝거리게 하루에 두 번씩 베이킹소다로 닦던 수전을 청소 못하는 게 너무 짜증이 났었습니다.

빨래야 힘 안 들이고 세탁기에 던져 넣음 되고 설거지는 남편이나 딸이 번갈아 해 주면 되었고 청소기도 대충은 흉내가 가능했는데 힘을 주어야 하는 수전을 닦아내는 일은 불가능했거든요. 손때와 물때와 비누 때가 가득한 세면대를 바라보는 게 고통스러운 결벽증 환자다운 결말은 오십견이 제격입니다.


스물서너 살 때의 연애할 때라면 남편은 저에게 그랬을 겁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며 절절매었겠지만, 이십 년 살 비비며 풍상을 겪어온 낡은 부부의 대화법은 참 많이도 발전했습니다. 어깨에 통증이 와서 헉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있으면 내가 어쩌겠냐는 표정으로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던 남편이 어찌나 얄밉던지요.

세월에 무심해진 남편의 애정(?) 덕분으로 재활치료를 더 열심히 했을 수도 있겠네요.

엊그제 찾아간 병원에서 선생님이 이동작 저동 작을 시켜보시더니 다음 주까지만 재활치료를 받으면 혼자서도 운동이 가능하다며 병원에 그만 와도 좋다고 하시더군요. 으앗! 대박이닷~~ 싶고 너무 기뻐서 마트로 달려가 딸기를 한 아름 담아 들고 들어와 딸기청을 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거운 칼을 들고 도마에 칼질을 해도 통증이 전달이 안되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고마운 분들께 한통씩 전달하려고 냉장실에 고이 저장해두었습니다.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했던 남편에게는 안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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