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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r 27. 2020

할머니와 아메리카노


#S1. 시골길 , 낮

노인이 신작로를 걷고 있다. (e, 전화벨 소리 울린다) 노인이 지팡이를 한 손으로 짚고 서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든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폴더폰의 전화기를 연다.


할머니    여보 , 정은이냐?  시방 간밤에 자다가  왼쪽 팔뚝이 쏙쏙 거리고 쑤셔갖고 병원 갔다가 집에 가는 중이다.

               내가 삐쳤냐고? 내가 삐쳤가니?

               니가 삐쳐서 전화를  안혔잖냐. 밥통  내고 밥이 잘되는가 어찡까 전화도  지가 삐쳤고만은 나보고 삐쳤다고 .


#S2. 정은이네 집 거실, 낮

식탁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다. 식탁 위에 커피 한잔 올려져 있다.


정은         (안쓰러운 ) 할머니, 더운   커피 한잔 마셔”

할머니(E)   그러믄 좋겄는디 돈을  갖고 나왔다, 조금만 걸으믄 된께로 집에 가서  먹을란다.


제가 요즘 배우고 있는 드라마 대본을 쓰는 기법으로 몇 년 전의 할머니와의 전화 대화를 써 봤습니다. 주문받은 음식을 끝내 놓고 할머니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던 어느 여름날이었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아마 할머니는 할머니의 '개아침'에 꼬깃꼬깃 지폐 몇 장을 가지고 나가셨을 겁니다. 돈이 없지 않으셨을 거란 건 병원을 갔다 오신다는 할머니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시커먼 찬물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단것 좀 쳐달라고 하면 커피 파는 애기가 시럽을 넣어준답니다. 얼음 동동 떠 있는 검은색 찬물 한잔을 안 들이키고 신작로를 걷고 계신 할머니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할머니의 주머니에서 아껴진 지폐 몇 장이 부피를 더해가게 되면 혼자 애 둘 키우는 손녀딸에게, 아직도 들일을 다니며 생활비를 버느라 고단한 환갑의 딸에게, 탁배기 한잔씩 걸치며 고추농사에 땀을 흘리고 있는 칠십의 철없는 큰아들에게 건네질 거랍니다.

할머니의 커피사랑은 꽤 오래전부터입니다. 시작은 제가 사드린 믹스커피부터였는데 뜨거운 커피물에 중독이 돼서 밥 먹고 나서는 꼭 커피포트에 물을 데우신답니다.
커피믹스 한 봉지 가격이 100원 남짓이니 드시고 싶을 때 실컷 드시라 해도 그깟 봉지커피도 아껴먹는 할머니한테 화가 나서 한 번은  실컷 사드릴 테니까 그건 제발 아끼지 마시라 했더니 저한테 그러셨습니다.

"니돈은 돈 아니 가니? 나는 니돈도 아깝다. 다리 아파가며 버는 돈이다"

우리 할머니의  '개아침'에는 늘 옷핀이 꽂혀 있습니다. 지폐 한 장이라도 도망갈세라, 꽁꽁 매여있습니다. 그 주머니의 옷핀은 검은 커피물을 먹고 싶을 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자식의 고단한 삶의 갈피갈피에 힘을 보태주려 할 때만 무거운  자물쇠가 열린답니다.
할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장 보러 간 마트 안에서  제가 좋아하는 스타벅스 간판이 크게 보였습니다. 습관처럼 들어가서 주문을 하려다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날은 그 '시커먼 찬물'을 못 마셨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어설프고 연극 대본 같은 드라마 대본 숙제를 2차로 수정해야 하는데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2017년 여름에 기록해 둔 이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쓰고 있는 대본도 할머니와의 있었던 일을 기초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수필 작법의 습관으로 드라마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조건을 맞추기가 어려워 애를 먹고 있습니다. 적당한 가공의 이야기를 추가해 시청자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은데 이제 배운 지 갓 두어 달 된 망생이의 습작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나 봅니다.


대본 수정이 1도 진척이 되질 않고 애꿎은 커피만 없애다가 또 할머니에게로 공상의 시간이 날아갔다 옵니다.

나의 또 다른 페르소나인 할머니도 그 할머니에게 양육된 내 드라마 속의 주인공에게도 개연성 있는 멋진 스토리를 입혀 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잔에 남은 커피가 없어지고 나면, 씬 구성표를 다시 들여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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