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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r 26. 2020

유기농 수제비


좋은 일이 생겼는데,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게
오늘은 좀 기분이 애매하게 가라앉더라.


누구에게 이 얘기를 해야 하나 궁리하며 전화기의

연락처를 검색해보다 그냥 말았어.
잊어버리고 수제비나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가 수줍게 웃으며 조미료
넣지 않은 육수라며 내 앞에 수제비 그릇을
놓아주는 사장님 덕분에 마음이 따뜻하더라고.

얄브스름한데 얇지 않고 쫄깃했어.
반죽은 찰지고 국물은 시원했지.
국물의 뒷맛을 아무리 뒤져도 미원 한 톨도
넣지 않은 게 분명한 말간 정직한 맛에
나도 같이 웃으며 말해줬어.

“진짜 너무 맛있어요! “했더니만
더 수줍게 웃으시며 그러시는 거야.

“ 전에는 천호동에서 남편이랑 같이 가게를
했는데 건물이 리모델링되면서 가겟세를
두배나 내라 그래서 권리금도 못 받고 그냥
나왔어요.
이 동네로 오니까 좋더라고요.
가겟세가 싸서 그 비용 절감해서 재료에
넣고 있어요.
알아봐 주시니 고마워요”

가게는 온통 새하얗더라고.
이제 막 칠을 끝낸 듯 눈부시게 새하얗고
아직 간판도 걸지 않은 그 가게를 찾아낸
내 직감이 감사한 오후였어.

미세먼지에 쌓여 하늘이 보이지 않던 날에
나도 맘이 잘 안 보여서 일하다 말고
나갔던 참이었거든.

딸아이가 2년 전에 어버이날에 써준 편지를
투명 파일에 넣어두고 보던 참인데
그게 자꾸 세월에 글씨가 흐려지는 거야.
아까워서 코팅이나 해두려 나갔던 길에
그 새하얗게 칠해놓은 수제비집이 보였던 게
참 다행이었어.

사장님은 내 앞에서 떠나질 못하고 자꾸
말을 걸고 싶은 눈치라,
나도 기쁘게 서로 이런저런 얘길 하며
수제비 한 그릇을 비우고
마음에 조금 생기려던 어떤 감정에
열기를 좀 쐬어줄 수가 있더라고.

괜찮았어... 괜찮아지더라.
수제비를 먹고 나니까 혼자 용비어천가를
스스로 불러대며 자랑스러워했던
몇 개의 자랑 글이 부끄러워 sns를  켜서
손가락으로 슥슥 지워버릴 수 있었어.

이쁘게 치장해놓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봄날 벚꽃들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추운 겨울비 맞고 축축하게 가라앉았지.

부를 사람이 없더라고...
불러봐야 뭐할 거야 싶더라.
따뜻한 밥 한 끼 해서 나눠먹으며 나를
진짜로 축하해줄 사람 , 그 얼굴들이 떠오르지
않아서 좀 기분이 그랬었어.

교회가 내 사회생활의 전부였던 지난 십여 년의
인간관계는 엄격히 말하면 실패작이야.
가볍게 보이고 속이 다 보이고 치근치근거려서
날 천하게 생각하고 귀찮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었거든.
그리고 , 이제는 돌이켜보니 진짜로 축하해줄
사람이 없더라고.

그런데 조미료 넣지 않은 육천 원짜리 수제비가
날 위로해줬어.
아. 그리고 또 하나,
딸의 편지를 오백 원에 이쁘게 코팅하고
돌아오면서 그것도 기분이 조금은 좋아지는데
한몫했어.

수제비 값으로 만원을 내었더니 사장님이
가진 잔돈이 삼천 원 밖에 없으신 거야.
무공해 육수로 만든 수제비가 단돈 육천 원.
그게 말이 되나 싶어서 사장님한테 거스름돈
더 안 주셔도 된다고 만류하고 나왔지.

오늘은 진짜, 수제비 한 그릇이 너무 고마웠어
간판도 걸지 않은 그 가게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작은 행운이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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