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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r 29. 2020

서운함 반쪽을 쌀과자 반쪽의 추억으로 덮어보다.

2020.3.20일의 기록.

거실에 티브이를 높은 볼륨으로 키워놓고 안 삐진 척 담요 덮고 소파에 누워있다가 쌀과자 반쪽이 생각났습니다. 그게 언제였더라 싶어서 카스의 해묵은 기록을 뒤져보았더니 2015년, 4월의 봄날에 있었던 에피소드였어요. 너무 소중한 기억이라 사진도 찍어 고이 간직하던 그날의 사정은 이랬습니다. 주문받은 음식을 다 해 놓고선, 파김치가 되어 설거지를 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현관문을 와락 열고 들어서는 겁니다.

입장이 하도 요란스럽길래, 이 녀석이 또 종일 화장실을 참고 있다가 집에서 볼일 보고 싶어 달려들어오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식탁 위에 책가방을 올려놓더니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로 지퍼를 열고 조심조심 쌀과자 한 개를 꺼내는 거였어요. 가방 안의 책이 달그락 거리는 통에 과자가 반으로 동강이 난 게 아쉬웠는지 잠시 찡그리다가 어서 먹어보라며 저를 재촉합니다.


“엄마! 엄마! 얼른 먹어봐, 친구가 일본 여행 갔다가 반 아이들 한 개씩 다 나눠줬는데 나는 엄마랑 먹으려고 안 먹고 가져왔어”


그 순간, 온몸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좀 전까지는 어서 눕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시금치 먹은 뽀빠이처럼 힘이 났던 거 같습니다.

나이가 마흔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베란다 나가서도 내가 왜 여길 나온 건지 한참 생각하다 다시 거실로 들어오는 건망증에 작은 기억들이 자꾸 소실되어도 그날의 쌀과자를 잊을 수가 있을까 싶네요.


해묵은 옛일을 다시 생각해낸 오늘 아침의 사정은 이렇습니다. 2주나 묵혀둔 대본 수정이 오래간만에 가속도가 붙었던 이유로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늦잠을 잤거든요. 11시가 다 되어 일어났으니 무슨 밥 맛이 있으려고요.

만사가 귀찮아져서 점심을 뭘 먹어야 하나 구시렁거리며 이런 날은 너네가 좀 간단히 해결하면 안 되느냐며 냉장고 야채칸을 뒤지고 있는데 얌전하던 딸이 독립투사처럼 번쩍 소파에서 일어납니다.


“엄마, 이번 주 내내 왜 그래? 엄마 귀찮을까 봐 점심 일주일 내내 나가서 사 먹은 거 기억 안 나? 왜 맨날 밥 먹으려면 엄마 눈치를 봐야 하는 건데”


야채칸을 뒤적거리다 놀라서 딸을 쳐다보니 밥에 국이 아니면 끼니로 쳐주지 않는 남편이 오!! 내가 하고 싶은 소리였어라며 반색을 합니다. 오십견 덕분으로 눈치를 보느라 한동안 외식을 자주 해도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던 남편도 불만이 잔뜩 쌓여있던 중인데 거기에 딸의 작은 반란이 너무 반가웠던 거죠.

어제저녁에 해준 멸치국수를 맛있게 먹던 부녀의 얼굴이 잠시 생각나 배신감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이번 주는 딸아이가 집밥을 며칠 안 먹은 거 같기도 하더란 말입니다.


머쓱해진 마음으로 스팸 한통 꺼내 다지고 김치 쫑쫑 썰어 파 기름 우려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줬습니다. 아쉽게도 찬밥이 딱 두 공기 분량이라 저는 그냥 패스했습니다. 사실, 먹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거든요.

그쯤에서 딸의 클레임이 해결되었으면 이리 세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위치에서 삐져 있을 일도 없을 텐데 눈치 없는 남편이 한마디를 더 거들어줍니다.

계란 노른자를 터트리며 ‘내가 해준’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먹으며 건넨 다는 말이 제 부아를 더 질렀습니다.

“예림이 말이 맞아, 너 요즘 너무 밥을 안 해줘. 밥 먹자고 하면 꼭 구걸하는 느낌이 들었단 말이지”


이럴 때 저는 따지지 않고 말을 아예 안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 이번 주에 밥을 몇 끼나 해주었던가 하고 말이죠. 그러다가 억울한 감정도 들었습니다. 나는 잠시도 게을러지면 안 되는 사람인가?

설거지 끝내 놓고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으니 남편은 안방으로 딸은 작은방으로 들어가서 거실엔 혼자 남았습니다. 뚱한 얼굴로 의미 없는 눈길로 티브이를 쳐다보다 갑자기 5년 전의 쌀과자가 생각이 난 거죠.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머릿속의 컨트롤타워에서 <우울>이가 저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뒤지다가 기가 막힌 추억거리를 뽑아낸 듯싶습니다.


쌀과자를 건네주고 싶어 학교에서 집으로 내달렸을 딸아이의 표정을 오늘 낮에 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던 딸아이의 얼굴에 덮어씌워봅니다.

그랬더니, 좀 전의 서운함이 조금은 감가상각이 됩니다. 세 식구가 행복하려면 늘 나 혼자 복닥거려야 하는 거야 싶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로 생각을 바꿔봅니다.


가족의 온기가 유지되려면 엄마의 밥이 땔감이 되어줘야 하는 모양입니다. 서로 어색한 분위기를 제일 쉽게 풀 수 있는 것 또한 제가 만든 따끈한 밥 한 끼가 제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은 황태육수 진하게 우려내어 청국장을 해줘야겠습니다. 어쩌겠어요. 내가 해준 밥을 먹어야 행복해하는걸요. 엄마 눈치 보며 먹게 된 김치볶음밥이 딸아이의 위장에서 잘 소화가 되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또 기분이 좋아지면, 반짝이는 눈으로 저에게 두 사람이 그렇게 물어볼 겁니다.

“저녁에 우리 뭐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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